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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광장] 광복의 노병, 최용덕

1969년 8월 15일은 스물세 번째 맞이하는 광복절이었다. 입추가 지나 더위가 한풀 꺾이는 때였지만, 그날은 섭씨 30도를 넘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오후 2시 40분,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461-5번지의 작은 집에서 광복투사이자 노병이 운명했다. 내가 죽으면 공군복을 입혀 묻어달라는 유언과 함께 주머니엔 외손녀 우유를 사주고 남은 돈 240원이 들어있었다. 이튿날 신문은 그의 부고 기사를 앞다퉈 송고했다. ‘청빈한 하늘의 사나이 광복절에 영면한 최용덕 장군’(경향신문), ‘광복투사 최용덕 장군 별세’(동아일보), ‘광복의 노병, 광복절에 숨지다’(조선일보), ‘우리가 만든 비행기 못 타본 게 한(恨)’(중앙일보).

나흘 후 8월 19일, 영결식 날에는 비가 내렸다. 공군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서 벗이었던 노산 이은상은 ‘... 비행기 사고로 떨어져/조각조각 부서진 다리뼈 겨우 붙여/ 항일전선의 표본품인양/ 절뚝거리며 다니던 불구장군!/ 이 땅에 우글거리는/ 사상의 불구자/ 지조의 불구자/ 정신의 불구자들을/ 꾸짖던 걸음걸이/...’라며 추도시를 낭송한다.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고인의 영전에 명복을 빈다’는 조전을 보내왔다. 일간지의 ‘여적(餘滴)’·‘만물상(萬物相)’ 같은 고정란에도 ‘일생 그대로가 조국의 광복과 재건에 전부를 바친 한 생애’, ‘대륙의 창공에서 조국의 광복을 수놓던 건국의 초석’, ‘집 한 칸 없었던 장군, 장관 자리까지를 역임했음에도 단돈 2백 40원뿐’, ‘광복절날 숨을 거둔 그의 영면이 우연의 소치라고만 할 것인가’라는 상찬이 이어졌다.

몇 해 전 필자는 공군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들과 함께 최용덕 장군 특별기획전을 개최했다. 350쪽의 자료집을 편집하고 발간했으며 학술대회에서 주제 발표를 한 적도 있다. 그의 생애는 특별기획전과 자료집 속에 온전히 녹여낼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치고 빛났다. 자료집 속에 들어있는 그의 자필 이력서 한 장을 다시 마주한다.

최용덕(崔用德) 1898년 9월 19일생/ 본적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7번지/ 1914 서울 봉명중학교 졸업/ 1920 중국 공군사관학교 졸업·교관/ 1940 중국 육군대학 졸업, 7년간 한국임시정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참모처장 등 직을 역임/ 1946 중국으로부터 환국/ 1948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초대 국방부 차관/ 1953 공군 참모총장에 취임, 공군 중장으로 승진/ 1960 체신부장관/ 1961 주중화민국 특명전권대사.

한 장의 갱지, 볼펜으로 눌러 쓴 열 줄에 스스로를 담았다. 이력서의 행간을 다시 읽어본다. 열정, 결기, 하늘, 조국, 겨레, 용서, 포용, 초석, 기다림, 서늘함 같은 단어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광복군이었고, 정부수립 당시 초대 국방부 차관이었으며,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전쟁영웅이었다. 건국훈장 독립장과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였지만, 신고 있던 구두도 벗어주는 베풂의 삶을 살았다. 며칠 전 일흔아홉 번째 광복절을 그는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국립서울현충원에 가서 묻고 싶다. 늦더위가 유독 길다.

안태현 국립항공박물관장

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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