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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 칼럼] “그녀가 폭행당할 때,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연출을 맡은 HBO의 오리지널 TV시리즈 ‘동조자’의 한 장면. 주인공인 베트남의 이중첩자 역할을 맡은 배우 호아 수안더(왼쪽)와 1인 5역을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쿠팡플레이 제공]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도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 ”

‘그’는 조국의 동포를 죽인 살인자였으며, ‘혁명의 동지’가 적에게 끔찍한 성고문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던 방관자였으며, ‘반동적인’ 사상과 문화에 감염된 동조자였다. ‘그’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푸른 눈을 가진 황인종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북베트남의 공산당원으로 남베트남의 비밀경찰로 잠입한 첩자였다. 동시에 CIA(미국 중앙정보국) 요원의 신임을 받는, 미국측으로선 매우 요긴한 정보원이자 협력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몸바쳤던 조국과 혁명으로부터 심판받았다.

‘그’는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 ‘동조자’의 주인공이다. 베트남전이라는 세계사적 격변기. 자유-공산 진영 뿐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가 충돌하는 최전선. 이중 삼중의 다중적 정체성으로 살아가야 했던 인물. 이로부터 ‘동조자’의 한없이 극적인, 역설과 모순으로 점철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파도 파도 끝없이 샘솟을 것 같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부터 퍼올린 희비극들이 말이다.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라는 서사의 씨앗을 공유하는 우리로선, 너무 닮아 오히려 특별할 것 없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2016년 미국 퓰리처상을 받은 베트남계 미국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명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박찬욱 감독의 ‘동조자’ 7부작 전부가 공개됐다. 미국에선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가 운영하는 케이블 채널 HBO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맥스에서 공개됐으며, 국내에선 쿠팡플레이를 통해 지난 4월 15일부터 5월 27일까지 매주 에피소드 한 편씩 방영됐다. (이하 소설·드라마 주요 내용 포함)

한국 감독이 드라마로 만든 베트남 사람의 베트남전

HBO 오리지널 시리즈인 이 작품에서 박찬욱 감독은 공동 쇼러너(showrunner·제작 총괄 책임)를 맡았으며, 1~3화를 연출했고, 시나리오 전체를 집필했다. 한국 출신의 세계적 거장 감독이 2~3시간의 장편 영화가 아닌 OTT 플랫폼의 드라마 시리즈를 다국적 자본·기술·인력으로 합작했다는 사실로도 문화산업적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동조자’의 동명 원작 소설도 탁월한 스토리 텔링과 날카롭고 깊이 있는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 응우옌은 능청스럽고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이다. 홀로 여러 인물을 연기하는 1인극을 하듯, 목소리를 바꿔가며 복화술을 하듯, 독자에게 ‘천일야화’같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소설은 스파이 활동을 끝내고 공산 치하 베트남으로 귀환한 주인공이 정보당국에 심문을 당하며 1년간 쓴 ‘자술서’ 형식으로 돼 있다. 이걸 드라마로 만든 박찬욱 감독은 ‘영상의 마법사’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드라마가 먼저이고 소설이 나중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말이다.

박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1~3화와 마크 먼든 연출의 5~7화는 고전 영화의 느낌이 물씬하다. 스파이 영화와 하드 보일드, 필름 누와르 스타일이 뒤섞였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있고, 살인과 음모·공작, 비정한 폭력과 범죄세계가 있다. 브라질 출신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두 교황’ ‘시티 오브 갓’ ‘콘스탄트 가드너’)이 연출한 4화는 독립된 한 편의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독자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4화는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스파이 활동을 계속하게 된 주인공이 베트남전 소재의 할리우드 영화 자문역으로 촬영 현장에 참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철저히 서구적 시각에 의해 재현되는 아시아인과 베트남전을 통해 미국 대중문화의 속성을 그린 에피소드다. 동남아의 거대 세트장에서 펼쳐지는 각종 소동을 박진감 넘치는 스펙터클과 냉소적인 어조로 보여준다.

그녀가 폭행당할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조국과 혁명으로부터 배신당한 남자

‘그’는 자유진영인 남베트남 비밀경찰 소속 대위이지만, 실상은 북베트남 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스파이다. 남측 장군의 비서로 활동하며 중요한 정보를 빼돌려 북에 넘긴다. 그는 프랑스인 신부가 베트남인 하녀를 범해서 낳은 자식이다. 북의 승전이 임박하자, 장군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남베트남 주민들을 이끌고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주인공은 ‘혁명이 성공한’ 조국에 남고 싶었으나, 공산당 지령에 따라 도미한다.

미국에 정착한 장군과 남베트남출신 이민자들은 돈을 모아 군대를 만들고 베트남으로 출정하는 ‘국토수복’ 작전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장군에게 충성을 보이고자 동포 2명을 죽인다. 그는 베트남으로 가는 선발대로 자원, 라오스를 통해 진입하려다 북베트남 군인들에 잡힌다. 그는 공산당의 첩보원이며 혁명의 공로자임을 주장하지만, 당은 그가 서구 사상과 문화에 오염됐다는 점을 들어 ‘재교육’을 받을 것을 명령한다. 그는 1년간 수감돼 엄한 감시와 혹독한 심문 속에 그 동안의 행적을 기록한 자술서를 쓰게 된다.

베트남 공산당은 그에게 스파이활동 중의 잘못을 추궁한다. 끔찍한 고문까지 가는 심문 속에서 그는 자신이 속했던 남베트남 비밀경찰이 잡은 공산당 여간첩을 생각해낸다. 그녀는 남베트남 비밀경찰로부터 성폭행을 포함한 잔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던 주인공은 ‘동지’의 희생을 지켜보기만 했다.

극중 베트남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행 장면은 3번 등장한다. 희생자는 프랑스인 신부에게 몸을 빼앗긴 주인공의 어머니,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미군 병사(소설에선 베트콩)에게 당하는 마을 주민, 그리고 남베트남 비밀 경찰에게 잡힌 여간첩이다. 이는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폭력적으로 유린된 베트남과 베트남 민중들을 상징한다. 동시에 주인공의 출생과 죄의식, 무력감의 원천이다.

‘동조자’의 한 장면 [쿠팡플레이 제공]

다섯 개의 자아를 가진 베트남청년, 1인 5역을 연기한 로다주

베트남계 배우 호아 수안더가 연기한 ‘그’는 반은 프랑스인, 반은 베트남인이다. 그의 신분은 북베트남 공산당원이었고, 남베트남 비밀경찰 소속 대위였다. 그리고 CIA의 장학생출신의 미국 정보원이었다.

혼혈인 그는 또래로부터 손가락질과 주먹질을 받으며 컸다. 그의 불우했던 소년시절을 구해준 것은 어머니, 그리고 두 친구였다. 세 소년은 피로 의형제를 맺었지만, 한 친구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당의 간부가 됐고, 또다른 친구는 극렬한 반공주의자가 돼 베트콩과 싸웠다. 이념이 갈라놓은 세 친구의 비극적 삶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제다.

그는 공산당의 지령에 의해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다워졌다.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밥 딜런·템프테이션·재니스 조플린·바니 게이의 노래들, 윌리엄 포크너와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 그리고 버번 위스키 짐 빔을 미국인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좋아하게 된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산당으로부터 끔찍한 감금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에게 최종의 ‘적’은 조국을 유린한 존재, 미국과 서구였다. 박 감독은 베트남에 미국·서구를 상징하는 인물 5명을 모두 한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다주’)에 맡겼다. 로다주는 극중 CIA 요원, 동양학 교수, 영화 감독, 보수 정치인 역 등 미국인 4명을 연기한다. 모두 베트남과 아시아의 이미지를 착취하는 이들이다. 애초 로다주는 1인 4역으로 알려졌지만, 마지막 7화에서 하나의 배역을 추가한다. 주인공의 아버지인 프랑스인 신부로 분한 것이다.

최인훈의 ‘광장’과 응우옌의 ‘동조자’

한국전쟁 발발 74년이 흘렀고, 베트남전 종전은 약 5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살육과 보복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 대학가에선 베트남전 당시의 반전운동과 닮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전쟁은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정치적 극단주의의 가장 파국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다. 전쟁은, 인간의 삶이 가진 총체성과 다양성에 대한 ‘살육’이며 ‘학살’이다. 전쟁은 언제나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지만 허용된 답은 피아(彼我) 양자택일 뿐이다. ‘동조자’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전쟁과 정치권력이 재단할 수 없는 삶의 풍부함과 다면성이다. ‘그’가 쓴 긴 ‘자술서’는 그 증거다.

실제 베트남 난민 출신인 응우옌은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인 2015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내 전쟁의 종전 40주년 기념일이다. 미국인들은 그것을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르며, 승리한 베트남인들은 미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두 명칭은 모두 부정확한 명칭이다. (...) 어쨌든 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전쟁의 명칭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그 ‘전쟁’일 뿐이며, 내 가족과 나도 바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응우옌의 말대로 전쟁은 이름이 필요하지 않지만, 전쟁이 파괴하는 개인들은 모두 고유한 이름을 갖는 개별적인 존재다. 박찬욱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념의 치열한 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한 희생이 이어지며 개인이 사라지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상과 진보, 혁명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은 이토록 어렵지만 끝끝내 포기해서는 안된다. 개인과 관용 양면을 보여줄 수 있는 객관적인 시야가 중요하다”고 했다.

‘동조자’의 주인공은 결국 공산정권에도 버려지고 미국도 베트남도 아닌 제3의 세계를 향한다. 우리라면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소설 ‘광장’은 개인을 ‘밀실’로, 사회를 ‘광장’으로 비유한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에선 ‘광장 없는 밀실’에, 북에선 ‘밀실 없는 광장’에 절망해 결국 제3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투신한다.

응우옌은 “우리의 베트남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세계 각지에선 전쟁이 계속되고, 극단주의는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을 부르고 있으며 양극화 속에서 강화되는 ‘정체성 정치’는 각국에서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 소설과 드라마로서 ‘동조자’는 끊임없이 되읽혀지는, 동시대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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