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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작’이라더니 1초에 1억씩…당신이 모를 수 있는 비밀이 [0.1초 그 사이]
⑥ 에드바르 뭉크 ‘절규’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한 작품이 명성을 얻게 되는 데는 작품성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컬렉터나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론 스캔들, 법적 분쟁, 도난 사건, 심지어 예술계를 뒤흔든 저항까지….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평판 높은 이런 미술품들은 단 0.1초 차이로 행방이 갈라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화면 속 남자는 손으로 볼을 감싼 게 아니다.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부분확대) [노르웨이 국립박물관·뭉크미술관]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나는 두 친구와 산책을 나갔다. 해가 질 무렵이었고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죽을 것 같은 피로를 느낀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몸을 기댔다. 불의 혓바닥과 핏물이 검푸른 협만과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었지만 나는 혼자서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때 나는 거대하고 무한한 자연의 절규를 들었다.

극도의 불안에 떨었던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 이 글은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절규(The Scream)’와 함께 뭉크가 남긴 일기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서리를 치며 괴로워하는 그림 속 남자의 고통이 느껴지시나요.

에드바르 뭉크, 절규, 오일, 파스텔, 크레용, 1893. [노르웨이 국립박물관·뭉크미술관]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손으로 양볼을 감싸고 있는 게 아닙니다.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있는 겁니다. 그의 일기에서도 절규는 ‘보았다’가 아닌 ‘들었다’라고 표현돼 있죠.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볼까요. 시뻘건 핏빛으로 번진 강렬한 자연의 절규가 온몸을 관통하는 것 마냥 남자의 눈, 코, 입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얼굴은 왜곡됐고, 몸은 비틀렸습니다. 네, 이 그림은 멈추지 않는 자연의 비명에 귀 막으며 몸서리치는 뭉크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그의 나이 서른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정신병자의 망작’, 100년 만에 최고가 작품으로
에드바르 뭉크의 파스텔 버전 절규 작품이 경매장에 출품된 모습. [AP]

그림이 처음 공개됐을 때까지만 해도 “진짜 미친 사람이 그린 망작”, “악마의 하수인”,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서 그림을 못 그리게 만들어야 한다” 등 뭉크는 거센 비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뒤, 세상 사람들은 이 그림을 정반대로 평가합니다. 뭉크의 절규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걸작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Nude, Green Leaves and Bust)’을 누르고 당시 미술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게 되거든요. 그것도 유화가 아닌 파스텔로 그린 버전이 말입니다.

때는 2012년 5월 2일 수요일 밤, 미국 뉴욕 소더비 이브닝 경매장. 이날 경매에 나온 이 작품의 최종 낙찰가는 추정가(8000만달러)를 훌쩍 뛰어넘은 1억1990만달러(한화 1355억여원). 최종 입찰자 5명의 열띤 경쟁 속에, 단 12분 만에 낙찰됐습니다. 뭉크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노르웨이 선박 갑부 토마스 올센의 아들 페테르 올센이 소장했다가 내놓은 작품이었는데요.

2012년 5월, 소더비 경매에 출품된 작품. 에드바르 뭉크, 절규, 파스텔, 1895. [소더비]
2012년 5월, 소더비 경매에 출품된 절규가 낙찰되는 모습. [AP]

뭉크의 절규는 석판화, 크레용, 유화, 드로잉, 템페라 등 약 50개의 버전이 더 있습니다. (뭉크가 그림 절규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그림이 팔리면 복제본을 그리며 절규 그 자체를 자신이 소장하길 바랐습니다.) 대부분 작품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위치한 국립박물관과 뭉크미술관에 있습니다. 파스텔 버전은 민간 소장자가 갖고 있는 것으로는 사실상 유일한 절규였고요. 경매 시장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절규이다 보니 가격은 그야말로 수직 상승했습니다. 단순 계산하면, 경매 시작과 동시에 1초에 1억씩 가격이 뛴 겁니다.

정작 이 작품을 가져간 사람은 경매장에 참석하지 않고 전화로 응찰한 이였죠. 그리고 뒤늦게 밝혀진 낙찰자의 정체는 예술품 수집가로 유명한 미국의 억만장자 레온 블랙. 당시 그는 사모펀드 투자회사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의 대표였습니다. 2012년 기준 자산이 34억 달러에 달하는 월가의 거물이었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 작가가 그린 그림이, 잘나가는 금융가의 부자 손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경매 직전에만 해도 자국의 미술관에 관람객을 끌어모으려고 하는 카타르 왕족이 작품 구매에 적극적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습니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 석판화, 1895. [뭉크미술관]
에드바르 뭉크, 절규, 우드 패널에 템페라와 파스텔, 1893. [Universal History Archive·게티이미지]

죽음이 늘 곁에 있는 삶…예술로 승화

그런데 이즈음 되면 궁금해지는 지점이 생깁니다. 뭉크는 왜 이토록 절규했던 걸까요. 그리고 그의 그림 가치가 이렇게나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요. 뭉크는 왜 뒤늦게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게 된 걸까요. 표현주의의 창시자이자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카소와 더불어 현대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선구자, 그가 바로 뭉크입니다. 실제로 그의 절규 속 비명은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마르틴 키펜베르거, 마를렌 뒤마, 트레이시 에민 등 작품에도 등장할 정도죠.

사실 뭉크는 지독한 정신 질환에 시달렸습니다. 그조차도 자신의 광기를 인정했습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절규의 왼쪽 상단 구석에 숨겨져 있었던 의문의 낙서가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

낙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뭉크 본인이었습니다. 이는 필체 대조 분석을 통해 비교적 최근인 2021년 밝혀진 사실입니다.

노르웨이 국립박물관 큐레이터가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 절규에 쓰여있는 글씨를 적외선 스캐너를 이용해 살피고 있다. [EPA/연합]
연필로 작게 쓰여진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 문구. [EPA/연합]

고통을 자양분 삼아 그림을 그린 뭉크는 삶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켰던 예술가였습니다. 45세가 되던 해 끝내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은 뭉크조차도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방향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라고 말하죠.

여기서 놀라운 점은 죽음이 항상 자기 곁을 떠돈다고 믿었던 그가 그 어떤 화가보다 장수하며 81년 평생 무려 2만5000여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는 점인데요. 가혹하리만치 외롭고 처절한 생의 한복판에서도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포스러운 삶, 그 자체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았던 것만 같습니다.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뭉크는 가족의 잇따른 죽음으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뭉크는 이미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습니다. 어머니의 사인은 결핵이었습니다. 그의 누나도 폐결핵으로 요절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뭉크에게 살인, 죽음, 유령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집착적으로 하며 정서적 학대를 일삼은 아버지마저 그가 스물 여섯이 되던 해에 뇌졸중으로 생을 달리합니다. 심지어 여동생은 정신 질환에 시달리게 되고, 끝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고요.

독일 베를린에서, 에드바르 뭉크. [게티이미지]

어쩌면 뭉크 역시도 악마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말의 발, 큰 뿔, 꼬리가 있는 검은 형체”라고 비교적 자세하게 그 모습을 묘사했거든요. 뭉크가 끝내 생을 달리하게 된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책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악령’이었습니다. 그렇게 뭉크는 이전에 보았던 것들과 그가 느낀 감정을 화폭에 그려 넣었습니다. 유독 그의 그림에서 가족의 죽음과 병에 대한 기억이 연관돼 표현된 자전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이유인데요.

평론가들은 그런 그의 그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술로 치부하지도 않았죠. 악령에 씐 미친 사람의 그림 정도로 뭉크의 그림을 평가절하했거든요. 특히 1892년 10월 말, 독일 베를린에서 55점의 유화를 내건 개인전을 연 뭉크는 그야말로 혹평을 받습니다. 당시 한 독일 언론은 “예술과 하등의 관계가 없으니 더 이상 논평이 필요 없다”라며 뭉크의 작품을 적대적으로 비난했고요. 뭉크의 전시는 기간을 채우지도 못하고 1주일 만에 끝내 문을 닫게 됩니다.

에드바르 뭉크, 멜랑콜리, 1894~1896. [베르겐, KODE 미술관, 라스무스 마이어 컬렉션]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뭉크는 매우 유명해집니다. (독일 미술사에서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간의 떠들썩한 평가와 논란에도 뭉크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죠. 아니, 붓을 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 누구보다 죽음에 천착한 그는 진정으로 살고 싶었던 것만 같거든요. 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린 뭉크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그 자체로 숨쉴 수 있었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도,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평화가 나를 감쌌다. 불안으로 죽을 것 같던 밤에도, 그림을 그리고 나면 행복한 기분으로 침대에 들었고 곧바로 잠에 빠졌다. 그림이 없었더라면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인간의 비극적인 혼란과 불안에 깊이 파고들며 인간 존재의 갖가지 면모를 담은 작품을 꾸준히 그렸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뭉크가 1893년부터 그린 ‘생의 프리즈’ 연작입니다. 절규도 생의 프리즈 작품 중 하나죠.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자면, 분명 그는 자신의 감정과 관심을 어떻게 제시해야 할지 완벽하게 아는 것만 같습니다. 아마도 그의 영혼이 너무 무거워서 그 어떤 생각도 짊어질 수 없기에,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선들이 공포를 구조화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싶거든요.

에드바르 뭉크, 불안, 1894.
에드바르 뭉크, 절망, 1892.

실제로 절규의 배경이 된 장소는 노르웨이에 있는 에케베르크 언덕입니다. 절규뿐만 아니라 그의 ‘절망’, ‘불안’ 그림에서도 발견되는 공통된 장소가 바로 이 언덕인데요. 뭉크가 이 언덕을 강박적으로 그린 데는 마음속 깊은 곳에 남은 상처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언덕에서 그의 어머니, 누나,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졌기 때문이죠. 여동생이 입원한 정신병원도 이 언덕 근처에 있고요. “지금 나는 정신이 이상해지기 직전이다. 정말이지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이 즈음 되면, 뭉크가 그림과 함께 남긴 글만 봐도 느껴집니다. 적나라하게 조우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붓질을 했다는 사실을 말이죠.

오슬로에 뭉크 작품 많은 건 히틀러 때문

뭉크는 조롱과 멸시를 받았던 바로 그 독일에서, 마흔 아홉의 나이에 다시 연 전시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바야흐로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분리파로 분류되는 새로운 예술 시대를 열었던 건데요.

1937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 전시실 모습.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말년의 뭉크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1933년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뭉크가 아돌프 히틀러의 타깃이 됐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는 현대미술에 대한 억압을 선포했습니다. 히틀러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풍을 추앙했습니다. 뭉크와 같은 현대적인 표현주의는 ‘퇴폐미술’이라고 낙인찍고 비난했고요. 실제로 나치 정부는 작품을 압수한 뒤, 현대미술을 웃음거리로 조롱하는 퇴폐미술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자신의 작품을 압수당하고 빼앗기게 된 뭉크는 노르웨이 오슬로 시에 남은 작품들을 모두 기증했고, 그 결과 오슬로 시가 그의 상당수 작품을 모두 소장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래서 뭉크의 그림을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더욱 찾기 어려운 겁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뭉크의 그림으로 절규부터 떠올리곤 하는데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 치료를 받고 돌아온 마흔 여덟의 뭉크가 그린 그림은 다름 아닌 ‘태양’ 입니다. 그가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대강당에 그린 장식화인데요. 뭉크가 그린 그림이 맞나 의아하실 겁니다. 얼어붙은 대지를 달구며 떠오르는 태양의 강렬한 햇빛이 참으로 눈이 부시거든요. 피곤이, 어둠이, 추위가, 공포가 몰려와 그 누구보다 광기의 그림자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뭉크를 구원한 건,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현실에서의 나의 예술은 스스로의 인생 관계를 직접 밝히고자 하는 시도다.” 모더니즘의 벼랑 끝에서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스스로를 고백한 가장 솔직한 작가가 뭉크가 아니었을까요.

에드바르 뭉크, 태양, 1911년. [오슬로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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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차에서는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의 작품세계를 비롯해 가장 비싸게 거래된 피카소의 그림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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