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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렸다 하면 1000억대…악평 따위 무시한 ‘황금빛 화가’의 고집 [0.1초 그 사이]
⑤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한 작품이 명성을 얻게 되는 데는 작품성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컬렉터나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론 스캔들, 법적 분쟁, 도난 사건, 심지어 예술계를 뒤흔든 저항까지….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평판 높은 이런 미술품들은 단 0.1초 차이로 행방이 갈라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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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황금시대에 그려진 작품(그림 확대).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 1907. [벨베데레 궁전]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한 명을 꼽는다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그 이름만 들어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가 있습니다. 눈부신 금박을 화면 전체에 바르고, 마음과 시선을 빼앗는 관능적인 여인을 그리는 ‘황금빛 화가’. 19세기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거장,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입니다.

상품 디자인으로 프린트된 클림트의 작품 ‘키스’를 한 번쯤은 보신 적이 있지 않으신지요. 실제로 키스는 클림트가 현대미술의 공헌자로 갈채를 받은 독보적인 작품입니다. 그것도 대담한 에로티시즘이 금기된 당시 오스트리아 빈의 상류층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된 에로틱한 그림이죠. 키스가 전시된 1908년, 오스트리아 황실은 전시가 끝나기도 전에 이 작품을 구입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현재 이 작품은 빈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에 전시돼 있습니다.)

클림트의 황금시대에 그려진 작품(그림 확대).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8~1909. [벨베데레 궁전]

그런데 비싸게 거래된 클림트의 하이라이트 시기 또다른 작품들을 알고 계실까요. 지금도 그의 그림에 눈독 들이는 전 세계 ‘큰손’ 컬렉터와 갤러리스트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그림 가격만 1000억원을 호가하는 클림트의 ‘역대급’ 비싼 작품들은 한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바로 클림트의 황금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1905년 이후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죠. (키스도 이 시대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외설적이다”, “표현이 과하다” 등 온갖 악평에도 관능으로 충만한 그림을 차곡차곡 그려나간 클림트. 그는 마침내 몽환적인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서 인생의 절정을 맛보게 됩니다. 외설 시비나 작품 철거 스캔들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 클림트의 고집이 30여 년 만에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게 된 겁니다. 욕망의 세계로 안내하는 그의 작품에서, 마침내 광채가 나는 이유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가족의 죽음, 그리고 달라진 예술세계
구스타프 클림트. 그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말수가 적고 고독을 즐기는 작가였다. [게티이미지]

예술적 신념을 위해서라면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던 미술계의 이단아, 그가 바로 클림트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클림트가 평생 전념한 핵심 주제였는데요. 그래서 그의 작업실에는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누드모델 두세 명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황홀과 쾌락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여성을 주로 그린 클림트의 그림을 비난하는 평론서도 숱하고요.

다만 분명한 사실은 관능의 정수를 보여주기 위한 클림트만의 실험적인 도전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그림은 틀에 박힌 전통을 깨는 자유, 그 자체였기 때문이죠. 마침내 자신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기까지 클림트는 꾸준히 내공을 쌓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탐미적인 색채와 화려한 금색을 쓴 화가가 아니었거든요.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화가들을 국제적으로 중요하게 인정받게 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1862년 7월,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금속 세공사의 일곱 형제 중 둘째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빈의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열여덟에는 빈의 역사 박물관의 내부 장식 작업을 의뢰받기까지 하고요. 그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모티브로 하면서도, 사실적이고 낭만적인 화풍이 가미된 그림을 그렸습니다. 절제돼 있으면서도 활기가 넘친 10대 소년 클림트의 그림은 단숨에 작품 의뢰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죠. 그는 일감이 끊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빈의 역사 박물관 내부에 장식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1888년작 작품. 옛 부르크극장의 관객석. 흔히 화려한 무대를 배경으로 그리는 구도가 아닌, 극을 보러 온 관객들의 모습을 세밀하면서도 낭만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았다. 실제 당시 빈 사교계 인물들의 얼굴이 정확하게 그려졌다. [빈 역사 박물관]

그러나 한차례 클림트의 화풍이 완전히 바뀌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이 클림트의 삶을 압도하면서 벌어진 변화입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그의 둘도 없는 예술적 동반자였던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Ernst Klimt·1864~1892)도 독감으로 사망하게 되는데요. 한순간에 가장 가까운 가족을 둘이나 잃은 클림트. 그는 깊은 상실감에 빠지다 결국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품고 사는 삶과 죽음이라는 실체, 그 내면세계에 깊이 몰두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3년 만에 다시 붓을 든 클림트는,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작품세계를 보여줍니다. 더 이상 현실을 이상화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 미술운동 흐름에 적극 참여한 것이기도 한데요.

클림트는 관능적으로 표현되는 자신의 작품 속에 상징적인 요소를 담기 시작했습니다. 은유의 이미지를 차용해 인간의 실존이 내포하는 수수께끼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투영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당시 빈의 주류 미술계는 클림트의 새로운 화풍을 달가워하지 않았죠. 클림트의 작품은 전시 출품조차 거부당하기에 이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철학, 1900~1907년. 1945년 5월에 임멘도르프성의 화재로 소실. 빈 대학의 교수들은 이 그림을 정통에 대한 이단의 공격으로 간주했다. 마치 어둠이 빛을 집어삼킨 듯한 그림이다.

특히 당대 최고의 대학인 빈 대학의 천장화를 위해 제작한 3점의 스케치는 끊임없는 파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철학, 법학, 의학 부문의 그림을 의뢰받은 클림트의 스케치에 빈 대학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건데요. 학문의 위대함과 사회 진보에 끼치는 인간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그림에 담아 달라는 빈 대학의 요구와 달리, 클림트의 그림은 노골적으로 파괴적이고 어두웠습니다. 그는 남성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유혹적인 팜므 파탈을 에로틱하게 표현하기까지 했죠.

누가 봐도 충격적이었던 클림트의 스케치를 잠시 살펴보면, 당시 들불처럼 번진 논란을 자연스레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클림트는 스케치에 대해 이렇다 할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바라보는 해석 또한 정답이 없는데요. 분명한 사실은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존재편협한 학문의 무기력성을 담은 듯한 메타포(은유)가 그의 스케치 속에 가득하단 겁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법학, 1900~1907년(그림 확대). 1945년 5월에 임멘도르프성의 화재로 소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느끼는 불안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구스타프 클림트, 의학, 1900~1907년(그림 확대). 1945년 5월에 임멘도르프성의 화재로 소실. 의학의 힘이 무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클림트였던 것 같다. 의학 스케치에는 시체와 해골이 그려져 있다.

그의 새로운 표현방식에 빈 대학의 교수들이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클림트는 외설적이고 과도한 성도착적 표현 혐의로 기소 당하기까지 했을 정도였거든요. 그의 그림에 반론을 제기하는 평론가들로 당시 클림트가 얼마나 혹평을 받았을지 상상이 되실까요. 결국 클림트는 국가로부터 받은 선수금을 전액 반납하고, 해당 그림들을 자신이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철학 스케치는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돼 금메달까지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빈 주류 미술계가 “우리 문화가 가진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클림트를 끝까지 매도한 것과 정확히 대비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클림트는 참지 않거든요. 격렬한 주류 미술계의 비판에 그는 그들을 조롱하는 듯한 그림 한 장으로 응수합니다. 그것은 상대를 멸시하는 듯한 눈빛과, 엉덩이를 들이 밀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물의 요정 나이아스가 묘사된 작품, 바로 ‘금붕어’입니다. 이 그림의 원제는 ‘나의 평론가들에게’였습니다. 평단의 분노는 정점에 다다르게 됐죠.

구스타프 클림트, 금붕어, 1901~1902. [졸로투른 시립미술관, 뒤비 뮐러 재단]

‘클림트st’의 시작
빈 분리파의 예술가들. 왕좌에 앉아 있는 듯한 클림트(왼쪽에서 두 번째)의 모습. [게티이미지]

“나는 검열을 너무 많이 받았다.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내 작품을 가로막는 불쾌하고 하찮은 것들을 벗어던지고자 한다.” 클림트는 예술가의 표현을 검열하는 주류 미술계를 향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그의 반항적 기질이 발동된 건데요. 그는 1897년 빈 미술가협회를 탈퇴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조직을 만들어 투쟁하기에 이릅니다. 19명의 예술가가 모인 이 집단이 바로 빈 분리파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건 하나였습니다. 완전한 자유였죠.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자 정신적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행보는 가진 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구별하는 아카데미즘의 간섭을 참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이자 돈만 밝히는 장사꾼 무리에서 벗어나겠다는 행동이었습니다. “시대에는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들의 자유를.” 19세기 폐쇄적인 예술을 떠나겠다는 빈 분리파의 모토에 따라 클림트는 경직된 비잔틴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합니다.

에곤 실레가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 드로잉(1913). 실레는 클림트의 지지와 경제적 지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실레의 영원한 스승이 클림트다. 다만 실레는 살아생전 “클림트를 뛰어넘었다”고 말했다. 이에 클림트도 “나를 뛰어넘은 화가”라며 실레를 추켜세웠다. [게티이미지]

이를 계기로 빈 분리파는 젊은 작가를 위한 미술관인, ‘분리하다’ 의미의 제체시온을 설립합니다. 당시 클림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신진 작가가 지난 회차에서 다룬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입니다. 그는 빈 분리파의 후원을 받아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거든요.

이어 1902년, 빈 분리파는 베토벤을 오마주한 전시를 여는데요. 베토벤 조각상을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하고, 베토벤의 음악을 재해석한 미술 작품을 내걸고,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는 파격적인 전시 공간을 구상했습니다. 미술·건축·음악·조형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예술’을 목표로 한 것이죠.

클림트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의 4악장 ‘환희의 송가’를 자신만의 해석으로 풀어낸 ‘베토벤 프리즈’ 벽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여기서 프리즈는 띠 벽지를 말합니다.) 유리, 금속, 황금, 보석까지. 다양한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 만든 황금색 광채는 이때부터 클림트의 스타일로 공고히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당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은 전시장에서 클림트의 비극적이고도 거룩한 프리즈에 찬사를 보냈죠.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미술관 제체시온. 황금색 월계수 잎을 새긴 돔이 눈에 띤다. 건물 정면에는 ‘시대에는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들의 자유를’이라고 쓰여 있다.
미술관 제체시온 내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프리즈.

하지만 전시장을 찾은 대중의 시선은 싸늘했습니다. 화면의 일부에서 보이는 여성의 음모나 정자와 난자 등 퇴폐적으로 해석되는 이미지에 불쾌감을 느낀 관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클림트의 프리즈에는 섹슈얼리티 자체를 무기로 삼는 여인이 등장하거든요. 클림트는 분명 예술과 사랑이라는 힘에 의한 인류의 구원을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욕과 무절제를 은유적으로 말하는 그리스 신화의 괴물 자매 세 고르곤이 그려진 패널이라니요. 전시는 비난을 받게 됐고,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빈 분리파 내부에서조차 클림트를 지지하는 세력과 비판하는 세력 사이의 갈등이 시작됐고요.

베토벤 프리즈(그림 확대). 그리스 신화의 괴물 자매 세 고르곤 모습.
베토벤 프리즈(그림 확대). 신에게조차 위협적인 존재였던 그리스 신화의 흉측한 거인 티포에우스 모습. 뱀의 꼬리와 날개를 가진 거대한 원숭이로 묘사됐다.
베토벤 프리즈(그림 확대). 포옹을 나누고 있는 여성과 남성의 모습. 천사들이 이들을 축복해주는 듯 보인다.

비로소 황금시대

클림트는 1905년 돌연 빈 분리파를 떠나기로 합니다. 모든 의뢰를 받지 않고 자신만의 개인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만의 세계로 깊이 침잠했습니다. 사랑, 여성의 아름다움, 탄생과 노화, 그리고 끝내 당도하게 되는 죽음까지. 생의 순환과 영적인 존재에 대한 그의 관심은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는 사회 문제나 정치적인 사안에는 전처럼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클림트의 걸작들은 이 시기에 대거 탄생했습니다. 클림트의 황금시대, 그 막이 오른 겁니다.

특히 그림 그 자체로 빛이 날 수 있도록 황금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이 인기의 핵심적인 키가 됐습니다. 현재 그 값만 1000억원 이상 호가하는 값비싼 그의 그림들은 이 시기에 그려졌는데요.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8~1909(그림 확대). 클림트의 황금시대에 그려진 작품. 대담한 에로티시즘이 금기되던 시기지만 그림이 주는 분위기와 표현에 의해 검열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림의 모델은 클림트 자신 그의 정신적 연인인 에밀리에 플뢰게인 것으로 해석된다. 이 작품으로 클림트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됐다. [벨베데레 궁전]
구스타프 클림트, 다나에, 1907~1908. 키스 이후 더욱 대담해진 클림프의 그림. 클림트의 황금시대에 그려진 작품으로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가 묘사됐다. [게티이미지]
구스타프 클림트, 생명의 나무(스토클레 프리즈를 위한 도안), 1910.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지식의 나무가 그려져 있다. 클림트의 황금시대에 그려진 작품. [게티이미지]

예컨대 클림트가 1907년에 그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Adele Bloch-Bauer·1881~1925)의 초상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는 아델레의 조카 마리아가 2006년에 미국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 창업자의 아들 로널드 로더에게 무려 약 1500억원(약 1억350만달러)에 판매한 작품입니다. 작품은 로더가 주축이 돼 설립한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에 전시돼 있는데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20세기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이 갤러리의 컬렉션 가운데 가장 값비싼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림을 잠시 감상해 볼까요. 빈 사교계 유명 인사이자 클림트의 든든한 후원자인 아델레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입은 옷과 배경은 추상적으로 표현됐고요. 화면은 비잔틴 양식을 따랐는데, 그의 의상에서 보이는 눈은 이집트 미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양입니다. 여러 차원으로 존재했던 클림트의 세계관이 화려하고 정교하게 통합된 건가 싶은데요.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I, 1907. [벨베데레 궁전]

그 자체로 매료시키는 금색 화면이 압권입니다. 황금빛은 각 작품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데요. 그 뜻을 떠나, (다소 과도해 보이는) 금색 장식은 무엇보다도 클림트의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관능적인 표현이 주는 충격을 약화하는 측면이 강하거든요. 이렇듯 작품이 풍기는 우아한 아우라는 당시 검열을 피하는 수단이 됐습니다. “어떤 인생도 예술적 노력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은 없다.” 대중은 물론 금욕적인 부르주아의 찬사까지 받게 된 클림트였으니, 이 즈음 되면 그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게 됩니다.

‘클림트st’ 업그레이드

다만 클림트의 찬란한 황금시대는 불과 5년여 만에 쇠퇴합니다. 영원한 우상은 없는 법. 실레를 비롯한 젊은 작가들이 절대적으로 존경했던 클림트는 시대에 뒤쳐진 존재로 치부되기 시작하거든요. 클림트가 즐겨 사용한 빛나는 금색과 비잔틴풍의 화려한 장식은 인간의 섬세한 심리를 드러내지 못하는 경직된 양식으로 전락합니다. 한 마디로 그의 그림이 촌스럽다는 겁니다. 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로 대표되는 표현주의가 도래한 것이죠. 클림트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이 시기 실레가 그린 그림. 에곤 실레, 고개 숙인 자화상, 1912. [게티이미지]

실레에게 절대적인 신과 같은 존재였던 클림트는 거꾸로 실레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클림트는 더는 호화로운 장식을 사용하지 않았죠. 넓은 단색조의 화면 구성을 시도했고, 이어 자신이 고수한 특유의 역동적인 색채로 스타일을 구축하게 됩니다. 이 시기 클림트는 특히 일본의 다색 목판화에 매료돼 동양적인 구도와 장식을 그림에 차용했습니다.

마침내 세상에 공개된 클림트의 새로운 그림은 어땠을까요. 한 마디로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는 대중과 평단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클림트의 그림은 불티나듯 팔렸고, 빈의 상류층 여성들은 클림트의 손에 그려진 초상화로 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꿈꿨죠. 이 시기 그려진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클림트 스스로가 자신의 그림에서 변하지 않는 어떤 특징을 확립한 것만 같습니다. 구상과 추상의 최초의 결합, 기하학적 양식화, 클림트만의 에로틱한 분위기, 풍요롭고 다채로운 색상까지.

구스타프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Ⅱ, 1912.

2006년 11월,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작품도 바로 이 시기에 그려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Ⅱ’입니다.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시장에서 거래된 적이 없는 명작이 미술품 경매를 통해 최초로 시장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전 세계 컬렉터들의 높은 관심 속에 추정가를 2배 이상 넘어서는 금액 약 1000억원(약 8790만달러)에 낙찰됐죠. (구매자는 미국의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윈프리는 10년 뒤 구매 가격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으로 중국인 컬렉터에게 해당 그림을 판매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클림트가 이때 그린 작품 ‘부채를 든 여인’은 지난해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약 1440억원(약 1억800만달러)에 팔렸는데요. 당시 이 작품은 유럽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오는 4월에는 빈의 경매회사 임 킨스키에 ‘리제르 양의 초상’이 출품될 예정인데요. 이 또한 클림트가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이고요. 이 그림의 추정가는 최소 15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부채를 든 여인, 1917~1918.
구스타프 클림트, 리제르 양의 초상, 1917.

그러나 이 그림들을 끝으로 1918년 1월, 클림트의 나이 쉰여섯. 갑작스러운 뇌출혈과 함께 그 해 2월, 스페인 독감까지 감염되면서 그는 폐렴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수많은 미완성 작품을 그대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난 클림트. 한평생 붓질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던 그의 집요한 탐구력은 여태껏 본 적 없는 관능의 미학으로 우리를 인도했던 것만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겸손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으며 다른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옳다는 확신은 없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뿐이다.

첫째, 나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는다. 나는 나를 소재로 삼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단지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이나 기이한 현상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라는 인간은 그다지 특별히 흥미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둘째, 특히 나 자신과 작업에 대해 뭔가를 말해야 할 때 글과 말은 내게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예술가로서의 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싶은 사람은 나의 작품을 주의 깊게 관찰해 그 그림들에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아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참고자료〉

구스타프 클림트, 질 네레, 마로니에북스

Split Decisions: When Critics Change Their Minds, Ann Landi, ARTnews

Klimt’s ‘Lady With a Fan’ Brings $108.4 Million, Auction Record for the Artist, Scott Reyburn, The New York Times

※다음 회차에서는 표현주의의 대가, 뭉크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의 작품세계를 비롯해 가장 비싸게 거래된 뭉크의 그림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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