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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故) 남궁원 배우의 인생 두가지 축, 영화와 가족
61년 간 영화 외길 인생
애뜻한 가족애도 회자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5일 별세한 영화배우 남궁원(본명 홍경일, 전 헤럴드 명예회장)의 인생 축은 크게 영화와 가족 두 가지였다. 61년 간 영화 외길 인생을 걸어왔고,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 가족을 돌봤다.

1958년 영화 ‘그 밤이 다시 오면’으로 데뷔해 314편의 영화에 출연한 고인은 한평생 영화인으로서 영화에 전념했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많은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기도 됐다. 그렇게 해서 지난 60여년간 영화계에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유명인이 되고 나서 정치권으로부터 숱한 러브콜을 모두 거절한 것은 물론 TV도 2011년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 한 편에 출연한 것 외에는 더 이상 출연하지 않았다.

데뷔 52년만에 처음으로 재벌 회장역을 맡아 안방극장에 선을 보인 남궁원은 당시 촬영장에서 “신인이니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는 긴 대사를 실수없이 소화해내 관록의 중후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영화와 함께 고인의 또 다른 인생 축은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다. 전성기 스타 배우가 가족 돌보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가정이 모든 것의 기본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고인과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홍정욱 헤럴드·올가니카 전 회장과의 일화 등 극진한 가족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노스웨스트항공 스튜어디스로 근무하던 양춘자 씨에게 비행기에서 첫눈에 반한 고인은 결혼에 골인해 슬하에 1남(정욱)2녀(성아·나리)를 뒀다.

아들을 유학 보내고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던 고인은 학비를 벌기 위해 자존심도 버리고 지방의 카바레 밤무대도 마다하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방학 중 귀국해 우연히 길에서 밤무대 포스터에 있는 아버지를 본 홍 회장은 그 순간 느낀 아버지의 사랑을 언급하기도 했다.

고인이 유독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산 것은 10대 시절 경험한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전쟁 초기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마루 밑에 숨어서 지내기도 했고, 퇴각하는 인민군을 피해 뒷산의 절로 피신을 했다가 가족을 잃어버릴 뻔 했던 기억들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가슴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남궁원〉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한국영상자료원)

고인은 영화계에서도 항상 성실함과 노력하는 자세로 좋은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초기에는 연기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배우가 됐기에 스스로 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었다. 외교관이 되기 위해 콜로라도 주립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가기로 한 시점에 어머니의 암 발병으로 어머니의 약값을 벌기 위해 갑작스레 영화에 출연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데뷔작인 노필 감독의 ‘그 밤이 다시 오면’이다. 고인은 연기력을 성장시킬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주연 배우가 됐다. 하지만 데뷔 이후엔 항상 연기를 공부하고 메모해 연기 분석 노트를 늘 가지고 다녔다. 고인은 평소 “연기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며 말하곤 했다. 그래서 더욱 공부하는 자세로 성실하게 연기를 쌓아왔다.

남궁원은 배우로서 잘 생긴 얼굴이 좋았지만, 키가 크고 서구적으로 잘 생겨 배역 맡기가 쉽지 만은 않았다. 1960~70년대만 해도 여배우들도 키가 작아 고인과의 ‘투샷’이 잘 잡히지 않았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인 김두호 전 영화평론가협회장은 “신상옥 감독이 남궁원을 가리켜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고 한 적이 있다. 한 10년 뒤에 태어났어야 할 미래형 배우라고 했다. 고인이 너무 잘 생기고 키가 커 오히려 배역의 제한을 받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고인은 미남 배우들이 주로 맡는 멋있는 역할만 맡지 않았다. 고인이 멋있는 역할만 맡았다면, 그만큼 이미지 소모가 빨라져 배우로서도 생명력이 짧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원은 잘 생긴 외모로 주연 배역을 따내기 보다 악역과 선역 가리지 않고 바닥부터 과정을 단계 별로 밟아 선 굵은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멜로와 가족영화 뿐만 아니라 첩보,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물에 도전해서도 존재감을 발휘했다.

‘간첩작전’(1966년) 등 007영화 같은 첩보 수사물에서는 한국의 제임스본드로 진가를 발휘했다. 1964년 영화 ‘빨간 마후라’에서 남궁원은 조종사로 작전 수행 중 죽은, 최은희의 전 애인으로 나와 존재감을 발휘했다. 1967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검객 영화 ‘풍운의 검객’에서 검객으로 나왔고, 이 때의 경험 축적은 2001년 일본에서 로케이션한 영화 ‘싸울아비’로 이어졌다.

이어 1968년에는 신상옥 감독의 ‘내시’에서는 임금 역할로 출연했고, 그 후 18년만인 1980년 이두용 감독의 ‘내시’에는 내시감 역할을 맡았다. 1969년 이만희 감독의 ‘여섯개의 그림자’에는 사기꾼을 맡았고, 1971년에는 한국 컬트영화의 창시자인 김기영 감독의 독특한 스릴러 영화 ‘화녀’에 출연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처럼 고인은 실로 다양한 장르에서 주연 조연 가리지 않고 맡은 역할에 충실한 연기로 한국 영화계에서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예명 남궁원은 ‘멀리 남쪽에 있는 궁전(南宮遠)’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고(故) 신상옥 감독이 지어주었다고 한다.(‘남궁원’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한국영상자료원)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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