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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광장] 오펜하이머와 영원한 핵 딜레마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왼쪽부터) 박사와 해리 S 트루먼 미국 전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전 대통령 [아메리칸프로메테우스 표지·백악관 갈무리]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가 한 말이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목도한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를 둘러싼 윤리적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고뇌했던 인물이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였지만 1950년대 초 수소폭탄 개발 문제가 논의됐을 때는 강력히 반대 활동을 전개했고, 살상력이 약한 전술 핵무기 개발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건의한 바도 있었다. 무고한 민간인 대량살상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긴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의 고뇌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민이기도 하다. 과연 원자폭탄은 탄생하지 말아야 할 무기였을까. 이미 만들어져서 되돌릴 수 없다면 무모하고 위험한 핵무기 개발 경쟁을 막는 방법은 없을까. 그리고 핵무기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고, 어떤 핵 독트린을 선택해야 할까.

핵과 관련된 핵심 질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윤리적 고려가 전략적 요구를 넘어설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무모한 핵개발 경쟁을 중단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핵 보유를 향한 비핵국가들의 열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이 핵전력 현대화를 멈추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현재 지구상에는 1만2000여기의 핵무기가 존재한다. 핵무기 100개와 1000개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핵 보유국들은 왜 수량을 줄이지 못하고 위력을 키우며 종류를 다양화하는 것일까. 핵 개발 자제가 어렵다는 것은 맨해튼 프로젝트뿐 아니라 수소폭탄 개발을 통해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수소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터졌던 원자폭탄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다. 1952년 1월 첫 수소폭탄 실험에서 확인된 위력이 10.4메가t, 그러니까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보다 500배나 강력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오펜하이머가 참여한 자문그룹은 트루먼 행정부에 만장일치로 수소탄 개발 반대 의견을 개진했던 것이다. “인류에 미치는 극단적인 위험이 어떠한 군사적 이득도 압도한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그러나 이슈의 무게에 비해 논란은 싱겁게 끝이 났다. 소련이 먼저 수소폭탄을 보유하는 것은 재앙이라는 의회와 군의 목소리가 있었고, 트루먼 대통령은 회의 시작 17분 만에 “선택의 여지가 없군”이라며 결론 지어 버린 것이다. 이렇듯 윤리적 호소가 전략적 요구를 넘어서긴 쉽지 않았는데 이점은 원자탄 개발, 수소탄 개발, 현대의 핵전력 현대화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다.

둘째, 핵에는 이제 사용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도덕적 혐오가 단단히 결부돼 있다. 그러나 이런 ‘핵 사용 금기(nucleartaboo)’는 얼마나 강력한 것일까. 핵 금기가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유의할 점은 무엇일까. 1945년 8월 이후 여러 전쟁이 있었지만 핵 보유국들은 자국이 갖고 있는 절대 무기 사용을 자제해왔다. 한국전쟁에선 맥아더 사령관이 만주에 대한 핵 폭격을 강력히 건의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하지 않았고, 베트남전쟁 때는 존슨 대통령이 전술핵 사용을 허가해 달라는 웨스트모어랜드 총사령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냉전도 아슬아슬했지만 핵전쟁의 참화 없이 끝이 났다. 우크라이나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핵 사용 위협만 할 뿐 재래전·소모전을 지속하고 있다. 핵 금기가 억제 효과를 내는 모양새다.

그러나 핵 사용 자제가 핵 금기의 효과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핵 시대를 맞아 당사국들이 모두 핵 사용 임계점을 넘지 않도록 신중하게 행동한 덕분일 수도 있다. 태평양전쟁처럼 극한의 상황에 몰리지 않았기에 핵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는 추론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핵전쟁을 막기 위해선 핵 금기라는 윤리적 측면에만 호소할 것이 아니라 상대의 전략적 계산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노력도 필요해보인다.

마지막으로 핵무기를 바라보는 관점도 지속적 논쟁거리다. 핵무기는 최후의 억제 수단인가, 아니면 필요 시 적극적으로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전투 수단인가. 트루먼 대통령은 일찍이 “핵무기는 군사적 무기가 아니다. 그건 군사적 용도가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비무장한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데 쓰인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반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술핵을 총알이나 다른 무기처럼 똑같이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발언했다.

핵무기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핵 독트린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 최후의 억제 수단으로 보면 상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히는 대량 파괴와 전략핵 보복 능력을 강조하게 된다. 윤리적으로 거부감이 크지만 핵전쟁 자체를 막는 데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반면 핵을 전투 수단으로 보게 되면 군사 표적을 향해 제한적으로, 전술적으로 사용하는 제한 핵전쟁을 지향하게 된다. 언뜻 대량 보복보다 윤리적인 것 같지만 핵 사용 문턱을 낮추고 결국 대규모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이 있다.

결국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고민했던 문제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핵개발 경쟁 압력, 핵 금기와 핵 사용 문턱 그리고 핵 독트린의 선택 문제는 영원히 해결하기 어려운 딜레마와 같다. 아마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계속 씨름해야 할 인류의 숙명적 과제가 될 것이다. 답이 없지만 고민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했던 오펜하이머처럼 말이다.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전 국방부 기조실장)

zzz@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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