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된 탄소 포집·저장 기술 안전·효율성 연구
‘넷제로 달성’ 대안 부상에 전세계 자본·인재 몰려
글로벌 기업들 기술 개발·저장고 확보 경쟁 치열
‘해외 고갈가스전 확보’ SK E&S도 프로젝트 속도
호주 오트웨이 국제 CCS(탄소 포집·저장) 실증센터 내에 방목 중인 소. 이곳 지하에는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저장돼 있지만 유출 위험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 [김은희 기자] |
[헤럴드경제(오트웨이)=김은희 기자] “여러분 발밑에는 9만5000t의 이산화탄소가 안전하게 저장돼 있습니다. 토양가스로도, 지하수로도 이산화탄소는 새어 올라오지 않아요. 보시다시피 푸른 잔디와 가축들, 그 밖에 여러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에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폴 바라클로그 오트웨이 국제 CCS(탄소 포집·저장) 실증센터 최고운영책임자(COO))
지난 15일(현지시간)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에서 차로 3시간 반쯤 달려 도착한 오트웨이 국제 CCS 실증센터는 호주 교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적한 시골 농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작은 건물이 한 채 있었고 그 옆으로 소 수십 마리가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드문드문 파묻힌 설비가 조금 크다는 것뿐이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이곳 지하에는 이산화탄소 저장고가 숨어 있었다. 넷제로(탄소중립)의 핵심 열쇠 중 하나인 CCS 기술을 검증하는 ‘거대한 실험실’이다.
지난 15일 찾은 호주 오트웨이 국제 CCS(탄소 포집·저장) 실증센터 입구 [김은희 기자] |
호주 오트웨이 국제 CCS(탄소 포집·저장) 실증센터 위치도. [CO2CRC 제공] |
호주 국책 연구기관인 CO2CRC가 지난 2004년부터 운영 중인 오트웨이 국제 CCS 실증센터는 세계 최대인 4.5㎢ 규모 CCS 실험실로, 기술 안정성을 높이고 포집·저장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도 2008년부터 합류해 이산화탄소 지중저장기술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CCS는 말 그대로 이산화탄소를 모아서(capture) 저장하는(storage) 기술이다. 여기에 활용(utilization) 기술까지 더한 것이 ‘CCUS’인데, 이산화탄소를 재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선 연구개발이 아직 미비해 전 세계적으로 CCS가 우선 상용화되는 추세다.
오트웨이 국제 CCS 실증센터는 탄소를 어떻게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지를 주로 연구한다. 인근 가스전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 고함량의 가스를 액체와 기체의 중간인 초임계 상태로 땅속에 주입하고 이들의 움직임을 탐지·추적하는 식이다.
이산화탄소 저장소는 최소 지하 800m 깊이의 육·해상 심부지층에 암석 틈 사이의 빈 공간, 즉 공극이 충분하고 그 위로 두껍고 단단한 덮개암이 존재해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오트웨이는 이 같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평가다.
일단 지면 2㎞ 아래에는 가스를 모두 빼낸 고갈가스전이, 1.5㎞ 아래에는 가스를 가둘 수 있는 다공질의 대염수층(염수를 함유한 지층)이 있고 각 저장층 위로는 이산화탄소의 상승이동을 막아주는 덮개층이 있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 이산화탄소가 80% 이상 함유돼 상업성이 없는 가스전이 있어 동일 성분의 탄소를 포집 없이 쉽게 또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다.
지난 15일 찾은 호주 오트웨이 국제 CCS(탄소 포집·저장) 실증센터 내 이산화탄소 주입정 [김은희 기자] |
지난 15일 찾은 호주 오트웨이 국제 CCS(탄소 포집·저장) 실증센터 내 이산화탄소 가스 이동 파이프라인 [김은희 기자] |
센터는 저류층에서 끌어올린 이산화탄소 가스를 지중 파이프라인을 통해 각 주입정으로 보내 이를 저장하고 관측정 등을 통해 이산화탄소 흐름과 누출 여부를 감지한다. 지난해까지 세 단계에 걸친 실증을 마쳤고 현재 4단계 연구를 준비 중이다.
우선 2009년까지는 첫 프로젝트로 고갈가스전에 이산화탄소 가스 6만5000t을 주입해 운반·주입·저장의 안전성을 입증했다. 이후 대염수층에 단계별로 각각 1만5000t의 이산화탄소 가스를 넣었다. 2단계에선 탄소가 저장층에서 어떤 형태로 가동하는지 장기간 흐름을 관측정을 통해 살폈고, 3단계에선 광섬유를 설치해 탄소 흐름을 보다 즉각적으로 모니터링 했다. 모두 이상은 없었다.
바라클로그 COO는 2008년 첫 주입 이후 15년째 탄소 저장소가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CCS는 이미 입증된 안전한 기술”이라며 “땅 속에 다량의 탄소가 저장돼 있는데 큰 규모의 지진에도 문제가 없었고 앞으로도 영구적으로 유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내년 말까지 진행되는 4단계 연구에선 첨가제를 넣어 탄소 주입 효율성을 높이는 여러 방안을 살필 계획이다. 2만t 규모로 예정된 탄소 주입은 내년부터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지질자원연구원은 국내 개발 주입·저장 효율 개선 기술을 이번 연구에 적용하기 위해 타당성을 검토하고 있다.
폴 바라클로그(오른쪽) 오트웨이 국제 CCS(탄소 포집·저장) 실증센터 최고운영책임자(COO)가 15일 오트웨이 CCS 실증센터에서 이산화탄소(CO2) 주입정 설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이원엽 SK E&S CCS사업개발팀 매니저. [김은희 기자] |
CCS는 탄소 배출을 전제한 기술이지만 넷제로 달성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손꼽힌다.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기반 에너지가 바뀌는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날 현장을 함께 둘러본 박용찬 지질자원연구원 박사는 “전기화가 어려운 정유·제철 등 산업 분야나 장거리 수송 분야는 화석연료에 상당 기간 의존할 수밖에 없고 저탄소 에너지인 천연가스도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밖에 없다”며 “화석연료 사용을 단번에 중단할 수 없다면 CCS는 필연적”이라고 했다.
CCS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1930년대부터 천연가스 생산 공정에서 불순물인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용도로 상용화돼 왔다. 이산화탄소를 석유·가스전에 주입해 채굴하기 어려운 원유·천연가스를 뽑아내는 EOR(원유회수증진)도 1970년대부터 활용되고 있다.
100년 역사의 기술이 최근 더욱 주목받는 것은 “CCS 기술 없이는 탄소 중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 글로벌 탄소중립 시나리오’에서 CCS 기술 기여도를 총 감축량의 18% 수준으로 제시했다. 단일 기술로는 탄소 감축에 가장 크게 기여한다.
CCUS(탄소 포집·활용·저장) 개요도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
지난 15일 찾은 호주 오트웨이 국제 CCS(탄소 포집·저장) 실증센터 내 이산화탄소 가스전 [김은희 기자] |
이날 찾은 오트웨이 센터의 경우 실증을 위한 공간이지만 전 세계에서는 미국·유럽을 중심으로 이미 30개 CCS 프로젝트가 상업 운영 중이다. 지난해까지 계획된 사업을 모두 합치면 총 이산화탄소 처리 용량은 2억4400만t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신규 개발 중인 CCS 프로젝트도 160여개가 넘는다. 이는 탄소 포집·저장 기술 개발에 전세계 투자 자금과 인재가 몰리고 있는 의미로 읽힌다.
2030년에는 탄소 40억t을, 2050년에는 76억t을 CCS로 감축해야 한다는 분석 결과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관련 투자는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탄소 저장소 보유를 둘러싼 주요국의 경쟁은 벌써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포집된 탄소를 저장할 만한 대규모 저장소가 현저히 부족하다. 정부 주도로 개발 중인 동해가스전을 활용한 CCS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만 글로벌 경쟁사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국내 기업으로는 SK E&S가 해외 고갈가스전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SK E&S는 호주 에너지기업인 산토스 등과 함께 연내 고갈이 예상되는 바유운단을 탄소 지중 저장소로 사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 호주에서 진행된 해상 이산화탄소 저장소 탐사권 입찰에서 산토스, 셰브론 등과 함께 G-11-AP 광구 운영권도 획득한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세계 주요국이 CCS 기술 개발과 이산화탄소 저장소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이산화탄소 운송 관련 법률이나 제도 관련 협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제언했다.
호주 오트웨이 국제 CCS(탄소 포집·저장) 실증센터 전경. [CO2CRC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