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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인·평택은 ‘新 애치슨라인’…日에 뺏기면 국가 안보 ‘위태’ [반도체 新한일전]
국가안보 직결 반도체 산업
한일 반도체 저력 비교
반도체 공장 경계선 따라 ‘新 애치슨라인’ 형성
국내의 한 반도체 생산 시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은 오늘날의 새로운 ‘애치슨 라인’과 같다. 반도체는 한국의 안보를 지키는 ‘호국신기’(護國神器·나라를 지키는 신의 무기)다. 반도체 주도권을 뺏긴다는 건, 우리나라 안보에 큰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양향자 무소속 의원)

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한-일 반도체 전쟁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전과 가장 다른 점은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이 기업간 문제를 넘어 산업간, 국가간, 진영간 대결로 확대됐다는 점이다.

반도체 공장들이 밀집한 한국의 평택·이천과 앞으로 지어질 용인, 그리고 대만 타이페이를 포함한 경계선은 ‘新 애치슨라인’이라고 불린다. 과거 미국의 극동 방위선처럼 지금은 반도체 공장 라인이 ‘산업적 방위선’으로 여겨진다. 경제 안보 차원에서 반도체 기술은 이젠 한국의 기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놓쳐서는 안되는 산업이 됐다.

굳건한 日 ‘소부장’ vs. 30년간 길러온 韓 메모리 저력

한국과 일본은 각각 다른 반도체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및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는 한국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지만, 그 기반이 되는 원천 기술에서는 일본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일본은 전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의 35%, 소재 시장의 55%를 차지하고 있는 전통적인 ‘소부장(소재·장비·부품)’ 강국이다. 지난 30년간 제조 기술 분야에서는 뒤처졌지만, 전반적인 반도체 공급망 체계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하이엔드(High-end)’소부장 기술로 압도적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 미국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일본의 소부장 업체 없이는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약점도 분명하다. 오랜 기간 반도체 제조 산업이 침체됐던 탓에 첨단 공정 기술이 현저히 떨어진다. 일본의 파운드리 기술은 현재 40나노 공정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3나노 공정 반도체 양산에 성공하고, 2나노 양산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10년 이상 뒤처진 셈이다.

당장 반도체 제조 관련 인력을 수급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통상 반도체 라인 한 곳에는 1500~3000명의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이 정도 규모의 인력은 단기간에 육성 및 투입이 어렵다. 현재 일본 구마모토 현에 공장을 짓고 있는 대만 TSMC도 현지 인력 수급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반면, 한국은 30년간 일궈온 탄탄한 반도체 제조 기술이 뒷받침된다는 이점이 있다. 최근 메모리 반도체 업황이 다소 나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60~70% 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범용 제품 뿐 아니라 최근 인공지능 서비스 확산으로 각광받고 있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메모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90%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 현장 [SK하이닉스 제공]

그러나 한국은 반도체 소부장 분야의 해외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 큰 약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장비의 국산화율은 20%, 소재는 50%에 그친다. 반도체 회로를 새길 때 쓰이는 포토레지스트의 일본 의존도는 지난해 77.4%로 여전히 높다. 한국무역협회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따른 한국의 기회 및 위협요인’ 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 소재에서 일본 수입비중은 40.1%로 가장 컸고, 중국과 미국이 각각 17.1%, 9.3%를 차지했다.

미국과 손잡고 2나노 굴기…글로벌 기업 무섭게 모은 日

반도체 산업 부흥을 위한 정부 지원과 투자에 있어서는 일본의 기세가 무섭다. 일본이 2021년 반도체 산업 부활을 선언한 후 올 6월 까지 발표한 관련 예산은 1조엔, 한화 9조2000억원에 달한다. 한국도 최근 들어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속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해 일본 정부는 주요 민간 기업 8곳과 공동 출자해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를 설립했다. 정부가 투자한 금액은 3300억엔, 한화로 약 3조원에 달한다. 라피더스는 현재 40나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일본 반도체 공정 기술을 빠르게 끌어올려, 2025년 2나노 반도체 시제품을 제작한 뒤 2027년에는 대량 생산에 나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목표지만, 글로벌 파트너십이 뒷받침하고 있다. 전문인력 100여 명을 미국 IBM에 파견하고, 관련 기술을 습득해 2나노 제품을 공동 개발한다. 10년이 넘는 격차를 미국 IBM과 협력해 단번에 줄이겠다는 전략이다.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에서 고이케 아쓰요시(왼쪽에서 두번째) 라피더스 사장과 다리오 길(왼쪽에서 세번째) IBM 수석부사장이 차세대 반도체 공동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 관련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교도통신]

인력 수급에도 적극적인 모습이다. 최근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히가시 데쓰로 라피더스 회장은 “최근 몇 달 동안 엔지니어링 팀을 확장하고 있다”며 “라피더스는 인력을 약 300~500명으로 확장하고, 반도체 양산이 시작되면 공장 운영 인력을 포함해 1000명 안팎의 직원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히가시 회장에 따르면 라피더스는 현재 해외에서 근무 중인 일본 엔지니어들로부터 지원서를 받고 있으며, 최근 미국에서 엔지니어 모집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으로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의 생산시설을 끌어들이겠다는 계획도 빠른 성과를 보이고 있다.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마이크론은 5000억엔을 들여 히로시마 공장에 신규 라인을 증설하기로 했고, 대만 TSMC는 86억 달러를 들여 구마모토현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추가 건설도 검토 중이다. 앞서 대만 언론은 TSMC가 1조엔(약 9조1000억원)을 투자해 구마모토현에 두번째 반도체 공장을 지을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미끼는 수조원대의 보조금이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설비투자의 최대 3분의 1, 반도체 장비 및 소재 투자의 최대 50%를 지원한다. 일본 정부는 마이크론에 2000억엔, TSMC에 4760억엔 등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구마모토의 TSMC 공장 건설 현장[교도통신]

국내 기업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 자국 반도체 소재 기업 사무코(SUMCO)가 규슈 지역 사가현에 짓는 실리콘 웨이퍼 공장에 750억엔(약 690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강점인 소부장 분야를 더욱 강화해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한국은 직접적인 보조금을 지원하지는 않는다. 지난 3월 일명 ‘K-칩스법’이 통과되며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제혜택율이 대기업 최대 25%, 중소기업 최대 35%로 높아졌다. 이로 인해 올해부터 5년간 13조원의 세금이 감면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미국, 유럽, 일본 등이 직접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기업 입장에서 실익이 크지 않다는 우려가 많다.

“용인·평택에 반도체 중심 둬야”…‘新 애치슨라인’ 된 반도체

전문가들은 반도체가 국제정세 및 경제안보 이슈와 얽히면서 한 국가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해졌다고 평가한다. 한국의 반도체 요충지인 평택·이천을 포함한 경계선이 ‘21세기 애치슨라인’이라는 목소리도 나올 정도다.

애치슨 라인이란, 1950년 1월 발표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다. 당시에는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반도가 사실상 제외됐다. 반면, 지금의 새로운 애치슨라인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이 있는 경기도 이천과 평택과 대만의 TSMC를 포함한다. 미중 경제 패권 다툼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반도체를 중심으로 생긴 새로운 경제 안보 방위선을 의미하는 셈이다.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123rf]

김정호 카이스트 교수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한다면 우리나라 안보에 큰 위협이 되는 것처럼, 반도체 공급망을 빼앗기는 것도 안보 측면에서 같은 맥락”이라며 “반도체 주도권을 뺏긴다면 한국의 안보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금 일본은 한국과 대만에 반도체 공장이 몰려 있는 것이 지정학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해, 미국과 대만에게 일본에 공장을 더 짓자고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지정학적 관계를 이용해 조용히 반도체 부활을 꿈꾸고 있어서 (한국은)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안보와 직결되는 반도체 공급망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기술 초격차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기술 패권 시대에서 한국이 경제안보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려면 다른 나라가 대체할 수 없는 초격차 기술을 보유하는 수밖에 없다”며 “미래 먹거리로 부상할 인공지능 서비스에 탑재되는 HBM 등에서 첨단 기술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jakme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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