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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인 배우 박지영·연출 임도완 “농인, 청인 서로에 대한 편견 덜어낸 계기” [인터뷰]
무장애 연극 ‘우리 읍내’, 6월 22일 개막
농인 배우 2명 ·청인 배우 14명 출연
말맛 살린 대사들…수어 번역이 관건
우리 삶을 연극적 언어로 담은 무대
“농인·청인 배우 경청하는 모습 인상적…
우리 모두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들”
 

연극 ‘우리 읍내’가 임도완 연출가(왼쪽)와 농인 배우 박지영(오른쪽)이 수어로 읍내를 표현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대 위엔 수많은 언어가 공존한다. 구성진 경상도 방언이 시끌벅적하게 가득 찰 때, 배우 박지영의 손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노래한다. 손의 움직임은 언어가 되고, 음악이 돼 무대를 채운다. 수백 마디의 음성 언어 사이를 가로지르는 정적의 손짓들. 서로 다른 언어의 만남은 그것 자체로 우리 사회의 한 장면이다.

“현영이 침묵 속에서 혼자 대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다른 세상 같아요. 만약 청인 배우였다면 전달하지 못했을 감정과 분위기,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임도완 연출)

연극 ‘우리 읍내’(6월 22~25일·국립극장 달오름)엔 두 명의 농인 배우(박지영, 김우경)와 14명의 청인(성언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비장애인) 배우, 수어통역사 5명, 음성해설사 1명이 무대에 오른다. 미국 극작가 손턴 와일드의 희곡. 전 세계에서 수없이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임도완 연출가와 함께 새 옷을 입었다. 그는 각색, 음악, 연출까지 도맡았다.

작품은 원작의 시공간을 뒤집었다. 1901년, 인구수 2642명에 불과한 미국 뉴햄프셔의 작은 마을은 1980년 경북 울진군 평해읍으로 이동했다. 당시 이 마을엔 2954명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원작의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공간”(임도완 연출)으로 만들기 위해 고생 끝에 발견한 지역이다. 임 연출가는 “이웃끼리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작은 지역, 언어 전달이 잘 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지역”으로 골랐다고 했다. 실재하는 지역을 통해 우리 삶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도 임 연출가의 방향성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가진 일상의 소소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요. 어느 시대에 가져다 놓아도 우리 주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죠. 다만, 지금과 1980년대의 정서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가족의 따뜻함을 말하기엔 이미 오래전 핵가족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 정서를 MZ 세대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시대를 뒤로 가게 됐어요.”

작품엔 1980년대 학생 시절을 보낸 임 연출가의 기억이 한국 현대사와 얽히며 이어진다. 마을 회관에서 울리는 새마을 노래, 학교에서 외워야 하는 국민교육헌장은 물론 동백림 사건과 같은 굵직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MZ 세대인 박지영은 “경험해보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이다 보니 연출님의 특훈을 받았다”며 웃었다.

무장애(배리어 프리)극으로 무대에 오르기 위해, 작품에선 인물들의 설정이 달라졌다. 원작 속 청인 에밀리는 농인 황현영으로 달라져 박지영이 연기한다. 또 다른 농인 배우 김우경은 신문 배달부 정효근 역과 무대감독의 수어 통역을 맡았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임 연출가는 “농인 배우들이 극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다”고 말했다.

연극 ‘우리 읍내’가 임도완 연출가(오른쪽)와 함께 새 옷을 입었다. 무대엔 농인 배우 박지영(왼쪽), 김우경과 14명의 청인 배우, 수어통역사 5명, 음성해설사 1명이 오른다. 1980년 경북 울진군 평해읍으로 이동한 이야기는 일상의 소중함과 가족의 따뜻함, 공존과 조화를 이야기한다. [국립극장 제공]
방언의 함축성, 향토성에 말맛 살린 대사들…수어로의 번역이 관건

“제일 높은 산은 부동산이고, 낮은 산은 출산이야.”

대사 한 줄 한 줄이 절묘했다. 경상북도 울진으로 공간을 옮기며 임도완 연출은 지역색을 듬뿍 담아낸 언어로 대본을 써내려갔다. 방언의 함축성과 리듬감을 담고, 시대성을 담아 말맛을 살린 대본은 농인 배우들에겐 쉽게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같았다.

박지영은 “대사를 수어로 번역하고, 적확한 수어로 표현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말장난, 관용구를 어색하지 않게 수어로 다시 만드는 과정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대사에 맞는 수어 표현을 찾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어요. 청인의 말투 중엔 수어에서 사용하지 않는 관용구들이 많아요. ‘네 똥 굵다’ 같은 거죠. 이 말을 수어 상황에서도 잘 어울리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음성 언어의 사투리를 수어로 표현하기 위해 ‘딱 맞는 단어’를 고르는 일도 쉽진 않았다. 박지영은 “음성언어는 사투리를 억양과 운율로 구분하지만, 수어의 방언은 단어로 표현한다”며 “같은 팥빙수라도 서울, 인천, 부산 등 지역마다 달리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을 찾는 과정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고 했다.

과제는 청인 배우에게도 따라왔다. 작품 속 농인과의 대화를 위해 배우들은 수어를 배웠다. 처음엔 어려워하던 배우들은 수개월의 연습 기간 동안 금세 수어를 익혔다. 임 연출가는 “나중엔 통역 없이 알아서 잘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연습할 때 지켜보니, 청인 배우들이 농인 배우들이 하는 장면을 너무 열심히 보더라고요. 청인끼리도 저렇게 경청하면 서로 덜 싸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임도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배우들의 무대는 ‘약간의 편견’을 안은채 시작됐다. “서로간의 소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 완전한 소통을 하기까진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편견이다. 임 연출가는 “농인 배우라고 해서 무대 위에서 소통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며 “청인 배우, 농인 배우 모두 가지고 있던 편견이 조금씩 덜어진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연극 ‘우리 읍내’의 임도완 연출가(오른쪽)와 농인 배우 박지영(왼쪽) [국립극장 제공]
여전히 ‘비장애인 중심’ 공연계…“농인, 청인 같은 세계 사람들”

지난 몇 년 사이 공연계에도 배리어 프리 작품이 늘고 있지만, 무대는 여전히 ‘비장애인 중심’의 세계다. 장애인 당사자가 주조연으로 나오는 작품도, 장애인 배우의 숫자도 절대적으로 적다. 박지영이 소속된 농인 문화예술 기획사 핸드스피크에도 농인 배우는 세 명 뿐이다.

연극 ‘스카팽’, ‘십이야’, ‘한여름 밤의 꿈’ 등 그간 많은 작품을 선보인 임도완 연출가도 농인 배우와의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무장애 공연이 서서히 나오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갈 길이 멀다”며 “장애인 배우들이 자신들의 정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연기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지금의 공연계로 더 많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대 위 배우에게 가장 큰 고민은 언제나 연기다. 박지영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문적으로 연기를 배운 적이 없다. 10여년 전 미국에서 TV를 보던 중 농인 배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배우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복지관에서 연기를 전부다.

박지영은 “자문해주는 선배나 선생님이 없어 청인 선배들에게 연기에 대해 묻곤 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에 표현 방식이 같을 순 없다. 홀로 걷는 길은 언제나 최선의 답을 찾는 과정이다.

“항상 표정이 과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요. 농인 배우들의 표정은 청인의 목소리 높낮이 표현과 같아요. 우리에겐 표정이 목소리인 거죠.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을 계속 듣다 보니 청인의 연기는 이미 콘텐츠가 있는데, 농인의 연기라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계속 찾아가는 중이에요.”

박지영의 이야기를 듣던 임 연출가는 “농인 배우들의 장점은 감정을 표정으로 과하게 드러내도 수어를 통해 정확하게 대사를 전달한다는 데에 있다”며 “표정을 통한 연기는 인물마다 다르게 표현하면 된다”며 조언했다.

그간 무대 위 농인 배우는 “작품 속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듣고 싶고 하는 역할”, 조금은 “가엽고 불쌍한 역할”이 많았다고 한다. 캐릭터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배우라면 아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는 최근에야 다양한 작품을 만나게 됐다. 뮤지컬 ‘미세먼지’, 연극 ‘사라지는 사람들’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고, 지난해 백상예술대상에선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 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으로 여자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농인 배우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박지영은 “언제나 관객들이 잘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몸을 열어야 하니, 한 번쯤은 등지고 수어 대사를 하는 연기도 해보고 싶다”며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서도 할 수 있는 연기와 대사는 무엇인지 많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읍내’에선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다. 임 연출가는 “현영이라는 역할이 박지영의 이미지와 잘 맞았다”고 말했다. 임 연출가가 요구한 것은 “1980년대 여고생의 모습”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박지영의 아이디어로 표현된 장면도 많다. 남자친구인 민규에 대한 현영의 서운함을 보여주기 위해 “주먹으로 가슴을 쥐어박는 신”이다. 임 연출가는 “대본에는 이런 상황을 주지 않았는데 굉장히 잘 표현된 장면”이라고 했다.

작품은 여러 의미의 화합과 공존을 말한다. 따뜻한 공기가 감싸안은 한 시대로 되돌아가 “우리의 삶 자체를 연극적인 언어”(임도완)로 보여준다. 이 곳에 농인도 있고, 청인도 있다. 인물의 설정을 바꾸며 각색 과정에선 임 연출가의 경험이 대본으로 녹아들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막내 동생에게 “내 눈이라도 주고 싶다”고 한 어머니의 말을, “내 고막이라도 주고 싶다”는 대사로 썼다. 무대 위에선 어느 한 인물도 소외되지 않고 존재감을 발한다. “잠깐 나와 대사하는 배우들도 인상이 남았으면 좋겠다”는 임 연출가의 생각 때문이다. 그는 작품의 거창한 메시지를 말하지는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도 않았다. 단지 “미술작품 보듯이 감상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때론 고통스러운 것도 삶의 일부분이에요. 행복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을 느끼고 간다면 좋을 것 같아요. 청인이든, 농인이든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임도완)

“이 연극을 장애와 비장애로 구분 짓거나, 장애와 비장애가 잘 어우러졌다는 시각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직 ‘우리 읍내’라는 작품으로만, 농인 배우가 아닌 한 작품에서 연기하는 배우로 봐주면 좋겠어요. 농인들도 공연장에서 거절의 경험을 하지 않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연극이 되길 바랍니다.” (박지영)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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