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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쿄 신오쿠보에 ‘한국여행’ 가는 일본인들
호떡·닭강정·김밥·핫도그·10엔빵
친구·연인·젊은 여성들 음식 즐겨
한류굿즈·화장품가게도 북적북적
한때 유행아닌 ‘K장르’ 문화 정착
지난 13일 도쿄 최대 한인타운인 신오쿠보 거리의 풍경. 일본의 젊은이들이 길거리 음식을 사 먹기 위해 곳곳에 길게 줄 서 있다. 도쿄=손미정 기자
일본 편의점 매대에 있는 한국식품

지난 13일 오후 일본 도쿄 최대 번화가인 신주쿠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인 신오쿠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주말이었지만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한국어 간판이 즐비한 거리 음식점 앞에는 어김없이 긴 대기줄이 있었고, 맛집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 사람들 때문에 어떤 곳은 ‘비집고’ 지나가야 할 정도였다. ▶관련기사 4면

신오쿠보는 도쿄 최대의 한인 타운이자 ‘일본 내 한류의 중심지’다. 3월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과 5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방한을 통해 양국관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한일관계를 가늠하는 ‘온도계’로 여겨지는 신오쿠보에도 상당한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최근 일본에서 한국이 인기 여행지로 다시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대신해 신오쿠보로 발걸음한 이들도 적잖았다. 실제 이달 초 일본의 황금연휴를 앞두고 한 여행사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은 하와이에 이어 일본인이 선호하는 여행지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철로 아래까지 대기줄이 늘어서 있는 ‘10엔빵’가게 앞에서 만난 이시카와 료코(29) 씨는 “주말을 맞아 남자친구와 한국음식을 먹으러 왔다”면서 “일정상 한국에 갈 여건이 되지 않아 아쉽지만, 대신 신오쿠보에 오면 한국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일본에서 제일 핫한 아이템은 단연 10엔빵”이라며 “오래 줄을 서 어렵게 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경주의 ‘10원빵’을 본떠 10엔 동전 모양으로 만든 빵에 모차렐라 치즈를 가득 채운 이 아이템은 최근 일본 젊은이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신오쿠보의 한 한식당 점원은 “10엔빵 덕분에 신오쿠보에 젊은 손님들이 더 많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10엔빵을 손에 든 손님들이 가게 옆에 서서 너도나도 신오쿠보 거리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10엔빵뿐만 아니라 신오쿠보 곳곳에 있는 길거리 음식점 앞에는 대부분 긴 대기줄이 있었다. 인도와 골목 사이사이에서 친구, 연인, 가족들이 호떡과 치즈핫도그, 닭강정, 김밥 등을 나눠 먹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도쿄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나가노현에서 친구와 함께 왔다는 한 여대생은 “한국은 여행가고 싶은 나라”라면서 “요즘 SNS나 친구 사이에서 한국의 먹거리가 가장 인기가 많다”고 밝혔다.

신오쿠보역에서 쏟아진 인파는 거리 초입의 사거리를 기점으로 갈라져 거리와 골목, 가게들을 가득 메웠다. 대부분이 10~2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들이었다.

신주쿠한인상인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현재 신오쿠보 상권에는 약 630여개의 한국 상점이 영업을 하고 있다. 신오쿠보 거리와 한인타운의 ‘핫플’ 이케멘 거리에 들어선 한류 관련 상점들에는 화장품 가게들도 어느곳하나 빠짐없이 손님들로 북적였다.

‘한류’ 간판을 내건 상점들은 아이돌 굿즈(관련 상품)에서부터 문구류, 캐릭터 상품, 화장품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품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녀와 함께 굿즈를 구경하거나 화장품을 고르는 중년 여성들도 많았다.

남편과 신오쿠보에 들른 한 60대 여성은 “평소에 화장품을 사러 많이 오는 편”이라면서 “한국 친구가 있어 한국에 대한 좋은 감정이 많다”고 했다.

최근 신오쿠보는 도쿄의 어느 번화가보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거리로 부상했다. 지난해 말 15세 이상 도쿄 거주자 20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 조사에 따르면 놀거리와 쇼핑, 먹거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젊은이의 거리’라 불리는 하라주쿠보다 신오쿠보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어느때보다 뜨거워진 ‘K-장르’의 인기가 신오쿠보를 젊은이의 거리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10~20대는 일부 기존 세대가 가지고 있는 반한 감정보다는 적극적으로 한국을 배우려는 의지가 더 크다는 것이다.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신오쿠보를 찾은 김그린(36) 씨는 “주변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이나 과외를 등록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댄스학원에도 K-팝 강좌를 따로 만들어 가르치고 있다”면서 “예전의 동방신기가 인기가 있던 시절 이상으로 (한류 붐이) 팍팍 느껴진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일본 젊은이들의 높은 호감도는 한일 관계에 따라 부침을 몸소 겪었던 신오쿠보 상인들에게 더욱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신오쿠보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한희순씨는 “예전에는 의협단들이 신오쿠보까지 와서 한인가게 가지말라고 하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면서 “요즘 젊은이들은 정치적 이슈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분위기다. 한류가 유행이 아닌 문화로 정착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8~29세 일본인의 64.7%가 ‘한국에 친밀함을 느낀다’고 밝혔다. 한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30~39세 일본인도 절반(54.8%)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 재일 한국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한인 타운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신오쿠보는 2000년대 초 드라마 ‘겨울연가’의 인기와 함께 ‘한류 중심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식당과 한류 전문매장들이 빠르게 늘어난 가운데, 동방신기와 소녀시대, 빅뱅 등으로 대표되는 K-팝이 이끄는 한류 붐까지 더해지며 2010년대 초까지 약 10년 동안 신오쿠보는 말그대로 ‘절정기’를 맞았다.

신오쿠보가 한일 관계의 직격탄을 맞은 것은 지난 2012년이었다. 그해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일왕의 사과를 요구하자 일본에서 반한(反韓)을 넘어 혐한(嫌韓) 정서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한인 타운에 발길을 끊었고, 텅빈 거리는 헤이트 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표현) 시위가 점령했다. 당시 혐한 정서의 영향으로 신오쿠보 방문객 수는 반토막이 났다. 점포의 40%가 문을 닫았다.

한식당에서 만난 한 40대 점원은 “혐한 감정이 심했을 때는 신오쿠보에 사람들이 없었던 건 물론이고, 자녀들이 한국말을 쓰면서 지나가면 욕설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절대 밖에서 만큼은 일본어를 쓰라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때문에 한일 관계의 암흑기를 함께했던 신오쿠보 상인들의 마음에는 어느날 갑자기 양국 관계가 나빠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여전히 남아있다.

정재욱 신주쿠한인상인연합회 회장은 “윤석열 정부가 한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어려운 결단을 하긴했지만 ‘헤이트 스피치’ 시절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면서 “정치적 문제가 우리에겐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 직결된다”고 말했다.

지난 2014년, 신오쿠보의 한인 상인들이 모여 ‘연합회’란 이름으로 모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유없는 화살들이 쏟아지고, 물리적·언어적 폭력의 타깃이 됐던 시절, 상인들은 한 데 뭉쳐 ‘비폭력’의 원칙을 지키며 대응했다. 거리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코로나19 사태 전까지 무료 셔틀 버스를 운행하고 거리 청소 활동도 벌였다.

정 회장은 “한일관계가 좋아졌다고 해서 당장 무엇인가가 바뀌고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면서 “하지만 양국관계 개선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분명히 좋은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나라 관계를 좋아지게 하려는 노력이 누구보다 반갑다”고 말했다.

도쿄=손미정 기자

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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