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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수민족 토착언어 담아낼 그릇 ‘한글의 가능성’을 열다 [헬로 한글]
지구촌 퍼뜨리는 한글 프로젝트
특성상 소리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
1994년부터 언어학자들 한글 수출 노력
찌아찌아족 위한 한국어 사전 출간도
1억명 한글 사용땐 주요 언어로서 큰의미
인도네시아 부톤섬에 사는 찌아찌아족 학생들이 한글 자모를 배우고 있다. [교보생명 제공]

세종대왕이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을 ‘어엿비’ 여겨 한글을 창제한 지 500여 년이 지난 1990년대. 한국 언어학자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프리카 등지로 나갔다.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을 이어받아 표기 체계가 없어 고유 언어와 문화가 사장될 위기에 처한 소수 민족들에게 한글을 전수하기 위해서다.

언어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실패했다. 인종과 문화, 종교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한국의 문자를 토착민들에게 보급하는 것은 언어학자들과 일부 선의의 후원자들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했던 탓이리라.

2주마다 한 개의 언어가 지구 상에서 사라지는 ‘언어 대멸종의 시대’. 그래도 다양한 발음을 24개의 쉬운 자모로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의 가능성은 여전하다. 한글이 한국어를 넘어 세계 여러 소수 민족의 토착 언어를 담아낼 그릇이 될 수 있을까.

▶아시아·남미 소수 민족에 한글 전파 노력=언어학자들의 한글 수출 노력은 지난 1994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이현복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는 태국 산악 지대에 사는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전파했다. 10년 가량의 노고 끝에 이 교수는 라후 부족의 비음(鼻音)을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해냈다.

2000년대에는 전광진 성균관대 중어중문과 교수가 중국 소수 민족들의 문화를 연구해 뤄바(珞巴)족, 어른춘(鄂倫春)족, 어원커(鄂溫克)족을 위한 한글 기반 표기 체계를 각각 2002년, 2004년, 2008년에 개발했다.

2015년에는 서볼리비아와 남페루, 북칠레 등 남미 대륙에 약 280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는 아이마라족을 위해 국내 언어학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세 차례의 현지 조사를 거친 후에 아이마라족의 언어에 담긴 어휘, 음소, 문장구조 등을 분석해 적절한 한글 표기 체계를 완성했다. 아이마라어와 한국어는 서로 다른 계열의 어족에 속해있지만 유성음, 무성음, 격음과 같은 자음 체계와 일부 비슷한 문법 구조를 공유하고 있어 가능했다.

물론 한글 표기 체계가 단번에 아이마라족 사이에서 채택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아이마라족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언어학자 권재일 교수는 “아이마라족은 현재 (한글 표기 체계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권 교수는 “당시 로마자를 차용해 쓰고 있던 아이마라족이 갑자기 (한글로) 쓰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라고 덧붙였다.

▶한글 프로젝트, 인니 부톤섬에서 성공=소수 민족을 위한 한글 프로젝트의 첫 성공은 아시아 섬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이뤄졌다. 훈민정음학회가 지난 2009년 제안했던, 인도네시아 동남 쪽 부톤섬에 사는 찌아찌아족에 의해서다.

찌아찌아족은 약 7만 명에 불과한 소수 민족으로, 부톤섬 바우바우시에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은 일상에서 로마자를 쓰고, 인도네시아어를 통해 소통하지만, 사실 이들의 모국어는 부토네즈어다. 그러나 갈수록 쓰는 사람이 줄어들고 표기 체계도 미비한 탓에 부토네즈어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훈민정음학회는 로마자 만으로 부토네즈어를 정확히 표기하는 데 한계가 존재하는 점을 파악, 한글 수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글은 음소의 특성 상 부토네즈어의 소리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재까지 수천 명의 찌아찌아족 학생들이 한글을 배워 사용하고 있으며, 바우바우 시내에서도 도로 표지판이나 간판 등에서 한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만은 않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표기 체계가 없는 토착 언어의 경우 로마자로 표기하도록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한글을 찌아찌아족의 표기 체계로 승인하지 않았는데도 국내 언론에서 지난 2010년 관련 보도를 내면서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지난 2012년에 부톤섬에 문을 연 세종학당재단의 어학당도 재정 부족 및 정부 지원 논란 속에 7개월 만에 문을 닫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 교사 정덕영씨와 찌아찌아 원주민 출신 아비딘 등 3명의 교사가 수 년간 한글 보급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 한글은 이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찌아찌아족의 한글 도입은 한국어 교육으로도 이어져 일부 중·고교에서는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채택할 정도다. 지난해에는 찌아찌아족을 위한 한국어 사전이 10여년 만에 출간됐고, 세종학당 및 한글학교가 각각 원암문화재단과 교보생명의 후원으로 문을 열기도 했다.

▶한글의 세계화, 관건은 패권주의 오해 없애는 것=한글의 세계화는 자칫 문화 우월주의나 패권 전략으로 비칠 수 있다. 아무리 한글이 문자로서의 범용 가능성이 크다 해도 이러한 오해를 받으면 한글의 세계화는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될 수 밖에 없다. 덕분에 정부 주도의 한글 보급 사업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지적이다.

아이마라 프로젝트를 주도한 언어학자이자 한글학회 회장인 권 교수 역시 정부 주도 ‘한글의 세계화’ 사업의 한계를 언급하며 “자국민이 쓸 언어로 외국어를 채택하려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글 전파 같은) 사업은 개인과 기업 등 민간단체들만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후원자를 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최근 IT(정보기술) 전문가, 컴퓨터프로그래밍 전문가, 언어학자 등으로 구성된 팀이 아이마라어, 중국어, 찌아찌아어 등 5개 언어를 타이핑할 수 있는 모바일용 한글 텍스트 입력 체계를 개발한 적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의 관심을 얻지 못해 상업적 출시를 하지 못했다.

이처럼 한글의 세계화는 여러 난관이 있지만, 백성들의 문맹 탈출을 바랐던 세종대왕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단체들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문호 훈민정음학회 이사장은 “현재 약 8000만 명 이상이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데, 1억명 정도가 한글을 사용하게 된다면 주요 언어로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라며 “10억 명의 전세계 사람들이 한글을 사용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했다.

코리아헤럴드=김소현 기자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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