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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명의 컬렉터, 잊힐뻔한 작가를 구하다
성곡미술관, 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원계홍, 수색역, 1979년, 캔버스에 유채, 45.5×53.2cm,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박성훈 [성곡미술관 제공]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1984년 윤영주 우드앤브릭 회장은 인사동 공창화랑에서 열렸던 원계홍(1923~1980)작가의 유작전에 방문한다. 순식간에 작품에 빠져들었던 그는 며칠 연속 화랑을 찾다가 결국 유족을 찾아가 함꺼번에 수십점을 구매했다. ‘작품이 함부로 흩어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1989년 김태섭 전 서울장신대 학장은 부암동에 산책을 나갔다 부동산 주인의 소개로 매물로 나온 집을 방문했다. ‘원계홍’이라는 작가의 집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으나, 방 한가득 작품 쌓인 작품이 좋았단다. ‘무언가에 홀린 듯’ 김 전 학장은 집과 그림 200여점 및 아카이브 전체를 인수했다. 치른 값은 당시 아파트 두 채 가격. 잔금마련하느라 한동안 고생했다고 회고한다. 김 전 학장은 현재까지도 원계홍 작가의 집에서 살고 있다. 작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 방 두 칸을 내주고, 정작 자신의 자녀들은 앞 집에 세를 얻어 공부방을 만들어 줬다.

원계홍, 홍은동 유진상가 뒷골목, 1979년, 캔버스에 유채, 46×53cm,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안태연 [성곡미술관 제공]

잊힐 뻔 했던 작가, 원계홍의 개인전이 서울 성곡미술관에서 열린다. ‘그 너머_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는 원계홍의 작품 100여점과 아카이브를 선보인다. 미술관측은 “원계홍의 ‘순수한’ 예술혼과, 그의 예술을 지켜낸 소장가들의 ‘순수한’ 애정을 기억하고자 하는 전시”라고 설명한다.

원계홍은 1940년대 도쿄 주오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그림에 빠져 이쿠노마 겐이치로 사설 아카데미에 다니는 등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귀국후 아틀리에에서 서구 거장의 이론을 독학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데 몰두했다. 정물과 풍경, 서울 골목길을 소재삼아 주로 그렸고 간간이 인물화와 추상화, 은지화도 제작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골목 풍경을 그렸다. 개발 전 서울의 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대담한 구도와 단순명쾌한 필치가 두드러진다. 에드워드 호퍼가 현대도시인의 외로움을 잡아냈듯 원계홍의 그림에서는 개발이 임박한 서울 뒷골목의 우수가 읽힌다. 이수균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은 “자녀분들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늘 일본어로 된 미학서를 읽고 있었다고 한다. 현대미술이론을 독학했던 작가는 회화에서 주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렸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원계홍, 회색 지붕,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33.3×45.3cm,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박성훈 [성곡미술관 제공]

그러나 작가는 생전에도 화단에서 잘 알려진 건 아니었다. 1978년 55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첫 개인전을 공간화랑에서 열었다. 자신감을 얻어 2번째 개인전을 1년 뒤 열고, 제 3회 중앙미술대전 초대전시를 통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 미국에 자녀를 만나러 갔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갑작스런 이른 죽음에 세상에서 잊혀질 뻔 했다. 그의 진가를 알아본 컬렉터 김태섭과 윤영주가 아니었다면.

이수균 실장은 “원계홍의 그림엔 불필요한 부분이 없다. 아주 솔직 담백하다. 그림만 보고 살았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바라보고 즐기고, 소장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 천상 소장가가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작품에만 매진하던 작가의 순수함, 작품에 매료돼 30년 넘게 이를 지켜온 소장가의 순수함이 전시장을 채운다. 5월 21일까지.

원계홍, 장미, 1977년, 캔버스에 유채, 34.5x26.5cm, ⓒ원계홍기념사업회, 사진 주명덕 [성곡미술관 제공]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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