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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한 세계, 우린 악마의 삼각 덫에 걸렸다[이형석의 불편한 편집숍]

국내 의사 10명 중 6명은 주 6일 이상 근무한다. 일주일 내내 일하는 의사도 전체의 14.4%다. 그중 개원의는 한달에 25일, 1년에 298일 근무한다. 외래 진료 의사는 하루에 34명, 일주일에 160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한다. 수술 환자는 하루평균 3~4명, 일주일엔 12~13명이다. 전체 의사의 48%는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극심하다”고 느끼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 ‘2020 전국의사조사’에 담긴 내용이다.

미국 대형 로펌에 소속된 저연차 변호사(associate lawyer)는 수임료 청구시간이 연간 1800~2200시간에 이른다. 대니얼 마코비츠 예일대 로스쿨 교수의 저서 ‘엘리트 세습’에 따르면, 로펌의 지분을 갖는 ‘파트너 변호사’의 청구시간은 최대 수준인 2400시간 정도다. 수임료 청구시간은 의뢰인의 사건을 처리하는 데 드는 변호사의 업무시간으로, 미국에선 6분 단위로 계산된다. 사건과 무관한 회사 행정업무나 식사, 용변 등 개인용무시간은 제외된다. 수임료 청구시간은 변호사 능력의 주요 지표다. 예일대 로스쿨 자료에 따르면 2200시간을 청구하려면 연간 최소 3058시간 일해야 한다. 평일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씩, 연간 10개월 동안은 매달 3주씩 토요일마다 7시간 추가 근로를 해야 한다.

대규모 실태 조사는 없었지만 국내 사정도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다양한 사례로 확인된다. 지난해 8월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발표한 ‘수습·소속변호사 노동인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주 52시간 근무제를 적용받고 있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12.9%뿐이었다. 대형로펌에선 하루평균 10~13시간, 일주일에 60~70시간 일하며, 심한 경우 월 300시간 근무한다고 한다. 지난 2015년 사법정책연구원 심포지엄 자료에 따르면 변호사가 주 60시간 이상 근무하는 비율은 대형로펌 41.9%, 중형로펌 38.9%, 공공기관 26.1%, 소형로펌 25.9%, 단독개업 17.9% 순이었다. 평균 연봉은 ‘대형로펌〉중형로펌〉사기업〉소형로펌〉단독개업·공공기관’ 순이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전인 8년 전 자료이지만 국내 변호사업계에서도 ‘고소득=고강도 노동’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확인된다.

누구나 피로한 세상이다. 의사나 변호사도 예외 없다. 많이 벌면 많이 버는 대로, 적게 벌면 적게 버는 대로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상어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가라앉고, 상어처럼 헤엄치지 않으면 숨쉴 수 없다. 뛰지 않으면 낙오한다. 계속 오르지 않으면 언제 끌어내려질지 모른다. 한 걸음 잘못 내딛으면 벼랑이다. 살펴보고 움직이고 예측해서 실행해야 한다. 안일함과 주저함을 허락하지 않는 이 경쟁은 가학적이다.

왜 더 풍요로워질수록 더 많이 더 오래 일해야 하는 것일까? 낙오의 공포에 못 이겨 스스로를 고강도 노동으로 혹사시킬 뿐 아니라 자녀들마저 가학적인 경쟁 속으로 밀어넣는 것일까? 왜 세계는 더 불행해지는 것일까?

세계의 학자와 전문가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부의 불평등으로 인한 경제의 양극화, 능력의 대물림을 위한 무한 교육경쟁, 정치의 적대적인 양극화다. 우리 삶은 이 세 가지 계기가 꼭짓점을 이루며 나선형으로 확장해가는 악마의 삼각 덫에 올려져 있다.

부의 불평등은 계층 구성에서 중산층이 차지했던 허리 혹은 중간지대를 거대한 구멍으로 만든다. 중산층은 소수의 상승하는 층과 다수의 하강하는 층으로 격렬하게 분화한다. 상위 계층에 새로 편입된 중산층은 상속 재산이 많은 기존의 상류층과 달리 학력·직업·지위·문화·소비 취향 등 ‘능력’을 자식 세대에 대물림하기 위해 교육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다. 마코비츠 교수는 ‘세습 엘리트’, 프랑스 파리경제대의 토마 피케티 교수는 ‘세습 중산층’, 사회학자 구해근 교수는 ‘특권 중산층’이라 지칭한 계층이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분석했듯 이들의 부상과 중산층의 분화는 미국과 최근 국내에서도 지배적인 담론으로 등장한 ‘공정’ ‘능력주의’의 배경이 됐다. 불평등의 심화는 사회의 분열을 가져온다. 정치의 양극화다. 국내에선 ‘편 가르기 정치’, 서구권에선 ‘정체성 정치’라 불리는 현상과 대체로 같은 의미다.

▶경제의 양극화...빈곤과 불평등이 가장 악화하는 시대=피케티 교수는 ‘21세기 자본’에서 경제의 양극화가 가속화되는 이유로 ▷연봉 수천·수백억원의 ‘슈퍼경영자’ 출현으로 상징되는 직종·지위 간 임금 격차의 극단적인 확대 ▷둔화된 경제성장률을 자본수익률이 지속적으로 상회하는 현상을 꼽았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선다는 말은 주식, 예금, 부동산 등 자산에서 비롯된 수입이 일해서 얻는 소득보다 많다는 뜻이다. 고소득자는 자신의 소득 일부를 지속적으로 자산화하기 때문에 부의 격차는 더 빠르게 벌어진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주요국들의 불평등지표는 경기 변동과 정부의 각종 조세·복지·금융 정책에 따라 일시적으로 개선되기도 하지만 수십년간의 장기적 추세에선 악화되고 있다. 특히 최근 코로나 팬데믹은 경기성장률의 둔화가 부의 분배를 더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이 크레디트스위스의 자료를 인용해 지난 1월 16일 발표한 불평등 보고서 ‘슈퍼리치의 생존’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었던 지난 2019년 11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2년간 세계에서 창출된 42조달러 중 63%인 26조달러가 상위 1%에 돌아갔다. 하위 99%보다 약 2배 많은 규모다. 옥스팜은 25년 만에 극심한 부와 빈곤이 동시에 증가했다고 평가했다. 세계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불평등과 빈곤이 가장 크게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계청의 ‘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2021년 상위 20% 계층(5분위)이 하위 20% 계층(1분위)보다 소득을 5.96배 벌어들였다. 이 비율은 1년간 0.11배 포인트 확대됐다. 시장소득 기준의 5분위 배율은 11.52배였다. 1년 전보다 0.15배 포인트 벌어졌다. 시장소득은 근로·사업·재산소득 등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이다. 여기에 정부 지원 등 공적 이전을 추가하면 처분가능소득이다.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수인 지니계수도 처분가능소득 기준 2020년 0.331에서 0.333으로 악화됐다. 지니계수는 0이면 완전평등, 1이면 완전 불평등을 뜻한다.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15년(0.396) 이후 2021년(0.405)까지 전반적인 상승세를 나타낸다. 처분가능소득 지니계수는 2011년 이후 완만한 하락세였으나 코로나로 다시 올랐다.

자산 불평등은 소득보다 더 악화 추세다. 지난 2021년 순자산 지니계수는 0.606으로 작년에 비해 0.003 증가했으며, 이는 관련 통계 작성이 시작된 2012년(0.617) 이후 1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자산 지니계수는 2017년 이후 2021년까지 비교적 강한 상승세다.

▶특권층과 일반층으로 분화하는 중산층...‘능력 세습’을 위한 격렬한 투쟁=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2019년 미국 대형 입시 비리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코비츠 교수의 ‘엘리트 세습’ 첫 장 첫 제목은 ‘치열해지는 교육’이다. 이 책들은 상위 0.1%나 1%의 최상류층이 아니라 상위 5~20% 사이에서 이뤄지는 신흥 엘리트 혹은 특권 중산층의 교육 열기에 주목한다. 의료, 법조, 금융, 행정, 교육, 정보통신기술 분야의 고소득자인 이들이야말로 지금 사회에서 가장 격렬하게 움직이는 계층이며, 사회 전체의 ‘서사’를 이끄는 이들이다. 그 서사는 능력의 대물림을 위한 교육에 집중된다.

한국형 서사에는 ‘강남’과 ‘SKY(서울·연세·고려대)’가 중심에 놓이고, ‘의대’와 ‘로스쿨’이 디테일을 이룬다.

지난해 서울대 전체 신입생의 10.4%는 강남·서초 소재 고교 출신이었다. 2020년 부모가 상위 20%의 고소득층인 신입생은 서울대가 전체의 62.9%, SKY는 55.1%였다. 서울대 의대는 84.5%, SKY 의대는 74.1%였다. 같은 해 상위 20%의 월소득은 950만원 이상이었다.

연봉이 1억원 넘어야 겨우 넘볼 수 있는 곳으로는 로스쿨도 마찬가지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육부에서 받은 ‘최근 3년간(2020~22년) 전국 25개 대학 로스쿨 소득구간별 재학생 현황’에 따르면 월소득 1024만원 이상(2022년 기준)인 상위 20% 가정의 서울대 로스쿨 재학생은 전체의 65.1%, SKY 로스쿨은 53.4%, 전국 로스쿨 평균은 45.5%였다. 서울대 로스쿨 재학생의 53.2%는 월소득 1536만원 이상의 상위 10% 가정 출신이었다.

엄청난 상속재산을 이어받아 인생을 즐기며 지냈던 과거의 유한계급과 달리, 고학력에 전문적 능력을 갖추고 고소득을 올리는 ‘신흥 엘리트’의 부상은 ‘실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능력주의를 전 사회의 지배적인 신념으로 만들었다. ‘세습 엘리트’ ‘공정하다는 착각’ ‘21세기 자본’ 등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다.

▶불평등이 분열로...편 가르기 정치의 일상화=한국과 미국의 다양한 사례와 통계들이 확인하듯 교육 경쟁은 학생들이 벌이는 극한의 학습·스펙·입시 경쟁일뿐 아니라 정보와 생산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학부모 간의 자본 투입 게임이다. 마코비츠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선 소득과 근면성이 서로 반대되는 경로를 걸었다. 가난한 사람은 엄청나게 오랜 시간 일해야 했고, 부유층은 일하지 않으면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의 발달과 경제·제도의 급변은 상황을 역전시켰다. 가장 숙련된 엘리트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데 반해 과거 대부분의 중산층이 차지하고 있던 관리직이나 중간 숙련 노동은 점점 불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고학력에 고급 전문기술을 가진 새로운 엘리트일수록 많이 열심히 일하지만, 중산층 및 하류층은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 적당히 일하거나 빈둥거릴 수밖에 없다. 엘리트 교육의 치열하고 경쟁적인 훈련 과정과 엘리트 직업의 엄청난 근면성 요구·과도한 보상은 능력주의를 신화화시킨다.

피케티 교수는 “현대사회의 불평등을 능력주의로 정당화하는 모습은 최상위층뿐만 아니라 하층과 중산층 사이의 더 낮은 계층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고 했다.

마코비츠 교수는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계층을 오해, 갈등, 불화는 물론 야전에 휘말리게 한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는 조직적인 계층 갈등을 조장해 사회적·정치적 생활을 망가뜨린다”고 했다.

사회·정치적 분열은 세계 주요국에서 포퓰리즘의 유행과 정치의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정치저널리스트 에즈라 클라인의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이하 ‘우리는 왜’)에 따르면 정치 양극화란, 중도층도 제3의 선택지도 없이 국민 여론이 흔히 두 개의 정당이나 이념으로 쪼개진 현상으로 요약된다. 이는 유권자들이 “이 정책이 나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가”보다는 “이 정책에 대한 지지는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를 기준으로 선택하는 ‘정체성 정치’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통계들이 있다. ‘우리는 왜’에 따르면 “자녀가 다른 정당 당원과 결혼하면 기분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을 미국민에게 던졌더니 1960년에는 공화당원의 5%, 민주당원의 4%만이 “속상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2008년엔 그 비율이 공화당원 27%, 민주당원 20%로, 2010년엔 공화당원 49%, 민주당원 33%로 늘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설문조사가 있었다. 조선일보가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2022년 12월 26~27일 전국 18세 이상 성인남녀 1022명에게 “나나 내 자녀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어떻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불편할 것”이라는 답이 43.6%, “편할 것”이라는 답이 45.7%였다.

2014년 미국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37%, 민주당원의 31%가 상대 당을 ‘국가 안녕에 대한 위협’이라고 답했다. 이 비율은 2016년엔 각각 45%와 41%까지 상승했다.

조선일보-케이스탯 조사에선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은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더 관심이 많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4.3%가 “그렇다”고 했다(이상 95%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고). 국민 10명 중 6명 이상이 자신과 다른 정치적 성향의 사람들에 대해 ‘국익에 해롭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본다는 얘기다.

이 같은 정치적 분열은 국가나 국민 전체를 위한 초당적 정책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포퓰리즘 정치세력이 극성하게 한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불평등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오히려 계층 간 적대감을 확산시킨다.

경제의 양극화와 격렬한 교육 경쟁, 정치의 적대적 양극화는 ‘되먹임 고리’를 형성하며 서로를 강화시킨다. 그 결과는 ‘번아웃 증후군(과도한 업무 몰입으로 인한 탈진 현상)’과 낙오의 공포, 그리고 분노·적대감의 일상화다. 우리 사회의 각종 지표는 악마의 삼각 덫, 그 고리가 어디에선가 끊어지지 않으면 우리 삶이 올려진 불행의 쳇바퀴는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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