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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어없는 사이버폭력, 신고·처벌도 없다
익명성에 숨은 SNS학폭 급증
‘주어’ 뺀 글에 피해자만 고통
익명 계정 만들어 괴롭히기도

#. 자신에 대한 헛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중학생 A양. A양은 자신과 한때 가깝게 지내다 멀어진 친구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서 소문의 근원을 찾아냈다. 이름을 명시하진 않았지만, A양임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들과 함께 ‘문란하다’, ‘여러 남학생과 동시에 사귀었다’는 등의 소문을 퍼트린 것. 명확한 증거가 없어 친구들을 추궁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신고는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자녀의 학교폭력 전력으로 정순신 변호사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하루 만에 자진 사퇴한 가운데, 여전히 학교 현장에 만연한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현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학교폭력 전문가들은 최근엔 증거가 남지 않아 피해자들이 신고조차 하기 어려운 ‘사이버폭력’이 급증하고 있어 관련 대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SNS상에서 피해자를 지목해 헛소문을 퍼트리지만 ‘주어’를 특정하진 않는 경우가 눈에 띈다. 피해자는 교우관계 등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등 피해를 입지만, 처벌은 쉽지 않다. 가해자 측에서 사실을 부인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A양 사건을 맡았던 구민혜 변호사(법률사무소 비상)는 “평소에 괴롭힘이 있었다는 등 정황을 입증해야 하는데 물리적 증거가 없이 주변 학생들의 진술을 설득해야 하니 절차가 까다로워진다”며 “A양은 가해자 그룹에 있던 한 학생이 ‘양심고백’으로 사실은 A양을 지목한 것이 맞다고 털어놔 극적으로 피해가 인정됐다”고 했다. 박성호 포렌식탐정 대표는 “네이버 밴드나 트위터 등 온라인상에서 자신에 대한 허위사실이 퍼트려졌다는 사실을 호소하면서 증거를 찾기 위해 포렌식을 의뢰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일부 피해자들은 민사소송을 통해 ‘명예훼손’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성립 요건인 ‘특정성’을 입증하기 어렵다. 나현경 변호사(법무법인 오현)는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사실을 입증받기 위해 반드시 실명이 명시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3자가 (피해 학생 관련 내용이 담긴)게시글을 봤을 때에도 특정인임이 충분히 드러나야 한다”며 “피해 학생 입장에서 단순히 ‘내 얘기인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것만으로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학교폭력을 전문으로 맡는 B 변호사는 “같은 학급 사이에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피해 학생을 포함한 단체대화방을 개설했다가, 피해 학생만 빼고 모두 나가버리길 반복했던 사례도 있었다”며 “피해 학생이 ‘왜 그러냐’고 해도 가해 학생들이 뚜렷한 답을 해주지 않았고 이런 일이 한 학기 내내 반복돼 상당한 심리적 고통을 받았지만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다”고 했다.

익명성 뒤에 숨는 가해 유형도 많다. 학교폭력 예방기관 ‘푸른나무재단’에는 최근 익명 계좌를 만들어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을 수 있는 SNS ‘에스크(Asked)’에서 발생한 학교폭력 신고가 급증하고 있다. 김석민 푸른나무재단 연구원은 “익명 에스크 계정을 만들어 특정 학생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며 “피해 학생의 이름은 명시하지 않아 피해 사실을 호소하기도 어렵고, 가해자도 익명이라 해결이 까다롭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재단 차원에서 심리상담 등을 제공하지만 가해자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사안이 해결된 건 아니니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해 9월 푸른나무재단이 청소년 600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선 ‘사이버폭력을 당해봤다’는 응답비중이 31.6%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과거 학교폭력의 전형적 유형이었던 언어폭력(19.2%)이나 따돌림(11.9%) 등을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박혜원 기자

k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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