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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달리는 작가, 뮤지엄에 묻다
스페이스 씨 개관 20주년 기념 신미경 개인전
‘시간/물질 : 생동하는 뮤지엄’
신미경, 라지 페인팅 시리즈, 2023, 코리아나미술관 20주년 기념전 '시간/물질:생동하는 뮤지엄' 전시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지하 1층 전시장에 들어서자 향기가 먼저 관객을 맞이한다. “작품에서 나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작가는 “제 작업실에서 늘 있는 냄새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많이나나요?”라고 되물었다. ‘비누조각가’로 잘 알려진 신미경의 개인전이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의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열리고 있다.

굵직한 현대미술 전시로 한국미술계에서 화제를 몰고 다녔던 코리아나미술관이 올해로 20년을 맞았다. 미술관은 한국 화장문화의 역사와 유물을 다루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과 함께 기념전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을 개최한다. 같은 건물의 지하 1·2층엔 미술관이, 5·6층엔 박물관이 자리해있다. 전시도 오르내리며 봐야한다. 작가는 현대미술이라는 씨줄 위에 역사와 유물이라는 날줄을 엮어 ‘시간’과 ‘물질’이라는 두가지 개념을 자유롭게 변주한다. 그리고 묻는다. ‘그래서 미술관은, 박물관은 무엇인가?’

신미경, 풍화프로젝트-레진, 2023, 코리아나미술관 20주년 기념전 '시간/물질:생동하는 뮤지엄' 전시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코리아나미술관 20주년 기념전 '시간/물질:생동하는 뮤지엄' 전시전경 [헤럴드DB]
수 백, 수 십, 수 년…서로 다른 시간층이 쌓인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난 작품은 신작인 ‘라지 페인팅 시리즈’다. 약 150호 크기의 평면 조각작품이다. 몽환적 유화 추상으로 보이나, 이것도 비누 조각이다. 100kg이 넘는 비누를 녹여 색과 향을 더하고, 틀 안에 부어 굳히는 과정을 거쳤다. 작가의 시간과 노동이 압축된 작품이다.

작가가 자신의 시간을 압축한다면, 이미 오랜시간이 쌓인 유물도 있다. 지하 2층 전시장에는 코리아나박물관 서양화 컬렉션과 소장조각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창업자인 송파 유상옥 회장이 1980년대 파리의 유수 화장품 회사를 방문했다가 그들의 미술관을 보고 컬렉팅을 결심했다고 한다. 여성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컬렉팅한 낭만주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2023), 2014년부터 작가가 골동품 액자 프레임을 수집해 복원하고 그림이 있던 자리를 비누로 채워 만든 ‘페인팅 시리즈’(2014-2023), 작가의 초창기 작업인 ‘트랜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1998)이 서로 교차하며 전시됐다.

코리아나미술관 소장품 살바도르 달리(조각)와 신미경의 페인팅 시리즈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낭만주의 작품이 품은 수 백 년의 시간, 유상옥 회장이 컬렉팅한 50여 년의 시간, 신미경 작가의 초기 작업이 버텨온 20여 년의 시간, 그리고 최근에 만들어진 작업까지 다양한 시간의 층위가 공존하는 셈이다. 작가는 “시간을 일부러 가져다 놓는 것을 우리는 ‘가짜’라고 한다. 갈라짐 같은 자연스러운 시간성, 작품과 작품 사이의 시간성을 느껴보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장실의 마리 앙투아네트

화장실에 설치된 비누 조각상, 코리아나미술관 20주년 기념전 '시간/물질:생동하는 뮤지엄' 전시전경 [헤럴드DB]

신미경 작가의 작업 중 가장 잘 알려진 화장실에 설치하는 비누 조각상은 이번 전시에도 마찬가지로 화장실에 설치됐다. 마리 앙트와네트다. 수 개월의 시간 뒤 수거한 비누상이 전시장에 안치되는 데, 마모되고 녹아 사라진 조각에서 관객들은 시간성을 읽어낸다. 비누라는 것을 사전에 알지 못하면, 마치 수 천년간 풍화된 고대 조각상처럼 보인다. 비누의 본 기능에서 벗어나 예술작품으로 권위를 획득하고 전시되는 과정은 어떤 사물이 시간성과 기능성이 정지된 채, 미술관 안에서 유물이 되는 과정과 닮아있다.

이미 이 과정을 거친 작업들은 화장박물관 6층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풍화 프로젝트’와 ‘화장실 프로젝트’를 통해 변형된 인물상이나 불상 조각을 다시 브론즈로 캐스팅했다. 비누가 지니는 가변성이 사라진 채, 각기 다른 차원의 시간성이 박제된 듯 정지했다. 작가는 좀 더 대담하게 박물관의 유물에 관여한다. 5층 전시실에는 고려·조선시대 청동거울과 비누로 만든 도자기에 은박·동박을 입혀 몇 백 년의 시간을 합축하고 있는 오래된 유물의 모습을 재현한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2018) 함께 놓였다. 이번 20주년 기념전은 6월 10일까지 이어진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소장 유물 '동경'과 신미경 '화석화된 시간'시리즈, 2018. 코리아나미술관 20주년 기념전 '시간/물질:생동하는 뮤지엄' 전시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스페이스 씨는…

스페이스 씨는 지난 2003년 신사동에 문을 열었다. 고(故) 정기용 건축가(1945-2011)가 설계한 이 건물엔 온고지신(溫故知新) 정신을 따라 한국 화장문화의 역사를 다루는 코리아나화장박물관과 신체, 여성, 아름다움을 주제로 동시대 미술을 선보이는 코리아나미술관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코리아나미술관은 지난 20년간 총 82회의 전시를 개최하며 한국현대미술계에서 다양한 이슈를 제기해 왔다. 대표 전시로는 ‘이미지 극장’(2006), ‘텔 미 허스토리’(2013), ‘히든 워커스’(2018), ‘프로필을 설정하세요’(2021) 등이 있다.

‘이미지 극장’에서는 현대미술이 연극과 무대 조건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 및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망했고, ‘텔 미 허스토리’에서는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여성서사의 다양성에 주목했다. ‘히든 워커스’에서는 돌봄노동으로 불리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여자들의 일’을 조명했다. 당시 미투(#MeToo)운동과 맞물리며 시의성이 높았던 전시로 평가된다. 2년 전 열렸던 ‘프로필을 설정하세요’는 최근 주요 이슈로 부상한 ‘멀티 페르소나 현상’등 정체성의 개념 변화와 이를 탐구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시선을 메타버스, 가상현실과 접목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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