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5조엔 설비투자 계획
日, TSMC와 밀월 ‘삼성 정조준’
지난해 출범한 일본 반도체 신설기업 ‘라피더스’의 고이케 야스요시(왼쪽) 사장과 히가시 데쓰로 회장. [교도통신] |
“지정학 측면에서 반도체가 석유보다 더 중요해질 것이다.”(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팻 겔싱어 인텔 CEO 발언)
반도체를 ‘무기’로 한 주요 국가들의 기술 안보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일본이 올해 첨단 칩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업계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25일 산업계에 따르면 올해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주요 국가간 반도체 첨단 칩 기술 경쟁에 뛰어드는 원년이 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지난달 말 발간된 산업연구원의 ‘미래전략산업브리핑’에서 김종기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일본의 차세대 반도체 역량 확보를 위한 투자가 본격화됐다”며 “경제 안보의 핵심인 반도체분야의 글로벌 경쟁구도에 일본이 가세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11월 중순 일본에선 2027년 차세대 로직 반도체 국산화 양산을 목표로 한 반도체 신설기업 ‘라피더스’가 출범했다. 라피더스는 도요타자동차, 소니, 기옥시아 등 일본의 주요 기업 8곳이 출자한 신설 법인이다. 2027년까지 슈퍼컴퓨터, 자율주행자동차, 인공지능 분야 등에서 활용되는 로직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향후 10년간 5조엔(약 48조원)의 설비투자 등을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에 이미 700억엔(약 683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더 지속적으로 자금을 대겠다는 입장이다.
라피더스는 2027년에 2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제품의 국산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최첨단 칩인 2나노 제품에 대해 삼성과 TSMC가 2025년, 미국의 인텔이 2024년 하반기를 목표로 경쟁하는 구도에 본격적으로 일본이 뛰어든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반도체가 경제 안보와 글로벌 공급망 강화의 핵심으로서 중요해진 시점에서 일본이 반도체 산업 재흥 계획을 본격 가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최근 일본이 대만의 TSMC와 밀월 관계를 형성하며 한국을 견제하고 있다는 분석 역시 제기된다. 현재 TSMC는 일본 구마모토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데, 최근 추가 공장 건설 가능성을 회사 측이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이미 TSMC는 일본 정부로부터 최대 4760억엔(약 4조5352억원) 보조를 받고 있다. 해당 공장에서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인 일본 소니의 상보형금속산화반도체(CMOS) 이미지센서가 위탁생산되며 해당 시장 2위인 삼성과의 격차를 더 벌릴지 주목된다.
미국은 인텔을 적극 지원하며 자국 반도체 산업의 규모를 키우고 있는 모양새다. 인텔은 지난 2021년 2월 파운드리 분야 재진출 선언했다. 이후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을 2개 짓고 지난해 1월엔 오하이오주에 대한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해 3월엔 유럽에 대한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하며 미국기업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미국 역시 ‘반도체 칩과 과학법’(반도체법)을 바탕으로 미국 내 반도체 시설 건립 지원과 연구 등 반도체 산업에 520억달러(약 72조4000억원)를 지원하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는 25%의 세액 공제를 제공하며 해외 기업들의 생산 공장을 미국 본토에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의 요구에 따라 올해도 이같은 흐름이 강화될 전망이다. SIA는 지난해 11월 말 발간한 ‘반도체 설계 주도권 유지·강화를 위한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 국가의 칩 기술력 부흥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 설계분야에 2030년까지 정부에서 200억~300억달러(약 26조~39조원) 가량 지원할 것을 제안했다.
지난해 3월 한국·일본·대만 정부에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 ‘칩(Chip) 4 동맹’ 결성을 제안했던 미국은 올해도 이같은 흐름 속에 중국을 배제한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지속할 전망이다. 미국은 중국의 16·14나노 반도체 제조 능력에 필수적인 심자외선(DUV) 장비의 대중국 수출금지를 네덜란드와 일본에 협조 요청하는 동시에, 한국에는 중국으로의 기술유출 방지 통제장치 마련을 요구한 상태다.
미국의 제재가 강도를 더해갈수록 중국은 ‘반도체 굴기’에 박차를 가하는 분위기다. 중국은 2030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를 목표로 삼아 ‘반도체 항모’로 불리는 칭화유니를 비롯해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와 2위 파운드리 업체 화훙 반도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방 정부들도 앞다퉈 자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현금 인센티브와 정책 지원을 내놓고 있다.
최근엔 미국의 제재에 대해서 ‘공정 질서 저해’라는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한편, 강점을 지닌 설계 분야와 성숙공정 파운드리의 점유율 제고, 지식재산(IP) 부문 자립화 등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대만은 TSMC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칩 산업 육성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해 대만의 칩 수출이 2021년보다 18.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9일(현지시간)엔 현지 반도체 회사들이 연간 연구개발(R&D) 비용의 25%를 세액 공제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산업혁신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 시행 기간은 2023년 1월1일부터 2029년 12월31일까지다.
이 개정안의 최대 수혜자는 TSMC와 UMC가 될 전망이다. 대만은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TSMC 한 회사가 전 세계 10나노 이하 반도체 생산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실제로 새 법안 발표 이후 TSMC와 UMC의 주가는 4% 이상 상승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반도체 관련해 글로벌 국가간 분업과 협력이 진행되다가 최근처럼 공급망이 분절되며 자국 중심주의가 부각된 모습”이라며 “최근 국가들의 움직임을 볼 때 자국 중심주의 구도가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김지헌·김민지 기자
raw@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