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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환마마’ 울창한 숲은 왜 민둥산이 됐나

호랑이가 자주 이야기에 등장하는 조선은 산림이 울창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산림은 황폐화하기 시작해 한일병탄 직전에 삼남 지방 대부분은 민둥산으로 변한다.

산림학자인 전영우 국민대 명예교수는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조계종출판사)에서 조선 숲의 황폐화는 적어도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말까지 250여년 동안 진행됐다고 밝힌다.

이렇게 추정하는 데는 이순신 장군의 ‘난즁일기’와 정약전의 ‘송정사의’의 기록이 근거가 된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와중에 전라좌수영에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고자 단시일에 40여 척의 군선을 건조했다. 그만큼 남부 지방의 숲이 울창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200년이 지나 1804년 정약전은 솔숲이 헐벗은 탓에 가난한 백성들이 비싼 관재값을 감당하지 못해 짚과 이엉으로 시신을 싸서 초장을 치른다고 탄식했다. 목재값이 20년 사이에 서너배가 올랐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마디로 총체적 비리, 난맥상이 벌어졌다.

우선 조선의 산림정책은 소나무 벌채 금지, 송금으로 요약된다. 군선과 조운선 건조, 수리에 필요한 소나무의 안정적 수급을 위해서다. 이런 송금 정책은 조선 후기엔 왕실과 권세가의 사익 추구와 충돌한다. 인구 증가로 소금 수요가 늘면서 왕실과 권세가는 판매용 소금 생산을 늘려 사익을 추구했고 솔숲은 소금가마용 땔감 조달을 위한 각축장이 된다. 여기에 임란 후 재정 부족을 메우기 위해 산림을 개간하거나 땔감을 채취하면서 황폐해 갔다.

저자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조림 양묘 기술 부재도 이유로 든다. 정조는 현릉원에 1200만 그루를 식재했는데, 양묘 기술이 없어 인근에서 어린 나무를 캐다가 옮겨 심었다. 활착 성공률이 20% 여서 서나 배나 많은 나무를 심어야 했다.

영세한 목재 상인의 불법 벌목도 황폐화를 부추겼다. 왕실·관리와 결탁한 상인은 벌채 허가권을 법적으로 확보한 뒤, 허가권을 악용해 더 많은 양을 벌채하고 세금은 회피해 최대한 이익을 챙겼다. 반면 목재 상인과 달리 공인은 산지에서 목재를 구입한 가격보다 더 싼 값으로 관에 납품해야 했고 부패한 관리에게 상납해야 했다. 목재상인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18세기 후반에는 공적인 목재 납품 제도는 무너진다.

목재 도구도 조악했다. 목재를 켜는 잉거 톱 제작과 보급 미비로 재질이 단단한 참나무 같은 활엽수 목재는 재목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도끼로 쉬 짜개고 다듬기 쉬운 소나무에 집중되다 보니 자원고갈로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민간에서 산림 황폐에 대처해 산림을 육성한 기록이 정조시대 무신 노상추의 일기에 나타난다. 여기에는 사찰도 기여했다.

인구는 3배로 증가헤 가사용 땔감 수요가 늘었지만 조림은 안되고 이용량만 느니 민둥산이 돼 간 것이다. 숙종 대 시작된 산림의 황폐화는 200년 동안 목재와 땔감 가격 폭등으로 백성들을 괴롭혀 왔다. 개혁군주 영정조 역시 산림 자원 고갈에 관해선 무능했다.

책은 그동안 제대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국토 산림 황폐화와 관련,‘승정원일기’를 비롯, 각종 개인 문헌과 일기 등을 통해 시기를 특정하고 원인을 다각적으로 밝혀낸 점이 돋보인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전영우 지음/조계종출판사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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