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 시행착오 딛고 진화
‘공연 영상계’ 맏형 예술의전당
공연장부터 스튜디오까지
영화 촬영용 장비, 이머시브 사운드
한 차원 높인 공연 영상 콘텐츠 제작
공연계의 ‘미래 먹거리’
예술의전당, 자체 플랫폼 구축 중
“돈 내고 볼 수 있는 콘텐츠,
가치있는 독립 콘텐츠로 제작”
네 명의 더블베이스 연주자로 구성된 에메트 앙상블은 최근 예술의전당 공연 영상 스튜디오 실감에서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를 연주하는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예술의전당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를 연주하는 더블베이스 연주자들의 손과 악기가 화면 가득 채워졌다. 카메라는 묵직한 소리를 내는 아름다운 악기를 클로즈업 하더니, 연주자의 손으로 이동하고, 시선을 조금 옮겨 얼굴로 향한다. 스튜디오 안에 자리 잡은 6대의 카메라는 에메트 앙상블의 모습을 담기 위해 활을 켜듯 렌즈를 옮겨 갔다. 카메라엔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은 물론 조화로운 소리를 쌓아가는 네 사람의 풀샷이 담긴다. 에메트 앙상블의 리더 성미경은 “최고의 장비로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멤버들과 의상까지 맞췄다”고 말하며 웃었다.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공연 영상 스튜디오 실감에선 에메트 앙상블의 뮤직비디오 촬영이 한창이었다. 예술의전당 공연영상제작지원 공모사업에 선정돼 이번 촬영이 진행됐다. 영상의 연출을 맡은 한경서 예술의전당 영상사업부 PD는 “멤버들의 연주 모습은 연기하는 모습까지 클로즈업으로 담았다”며 “영화적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조명을 사용하고, 워킹도 다양하게 연출해 기존의 클래식 영상과는 다른 뮤직비디오와 같은 영상으로 촬영했다”고 말했다.
‘손 안의 공연’들이 진화하고 있다. 공연장에 가야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라이브 공연’은 언제 어디서든 ‘접속 가능한’ 콘텐츠가 됐다. 코로나19가 당도하며 본격적인 첫 걸음을 시작한 ‘공연 영상’에 대한 인식 역시 달라지기 시작했다.
문성욱 예술의전당 공연예술본부 영상사업부 부장은 “코로나19를 지나오며 공연 영상이 차지하는 입지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공연 영상’은 팬데믹 시대의 위기를 헤쳐나갈 돌파구로 시작됐지만, 모두에게 불청객이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업계에서 조차 공연 영상에 대한 시각은 회의적이었다. 공연계에선 ‘현장 예술’의 정통성이 강조됐다. 영상은 “공연이 아니라”는 입장이 다수였다. 영화계 등 영상 콘텐츠 업계에선 “이건 영상이라 볼 수 없다”며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현장 공연의 강점도, 영상의 강점도 담아내지 못한 콘텐츠가 다수였기 때문이다.
문 부장은 “공연계와 영상 업계 모두 우리 문법에는 맞지 않고, 애매하다고 했던 공연 영상이 이제는 어딘가에 속하는 것이 아닌 독립적인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됐다”고 말했다. 관객들의 변화도 따라온다. 과거 “현장 공연의 대체 수단”으로 받아들였던 공연 영상은 이젠 ‘독자적인 콘텐츠’로의 가치를 지닌다. 문 부장은 “공연 영상에 대한 관객들의 감정적 허들이 많이 낮아졌다”고 봤다.
국내 공연 영상의 역사는 예술의전당에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술의전당은 ‘공연 영상화’ 사업의 선두주자이자, 국내 ‘공연 영상’의 시초다. [예술의전당 제공] |
■ ‘싹 온 스크린’으로 시작…공연 영상의 역사와 진화
공연 영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진 것은 지난 3년 사이 나온 콘텐츠의 질적 변화 때문이다. 현재의 공연 영상은 제작 과정부터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국내 공연 영상의 역사는 예술의전당에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술의전당은 ‘공연 영상화’ 사업의 선두주자이자, 국내 ‘공연 영상’의 시초다.
2013년 예술의전당에선 공연 영상물 제작 브랜드인 ‘싹 온 스크린(SAC(Seoul Arts Center) On Screen)’을 시작하며 영상화 사업의 첫발을 뗐다. 초창기 공연 영상의 제작 배경은 지금과는 달랐다.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접근이었다. 당시 ‘싹 온 스크린’ TF로 함께 했던 문 부장은 “예술의전당에 올 수 없는 백령도의 초등학생도 전당의 공연을 큰 영상을 봤으면 좋겠다는 포부를 안고 시작됐다”고 말했다. 최고의 장비로 클래식 음악부터 뮤지컬, 발레, 연극,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전 장르를 아우르는 영상 작업을 진행, 전국의 공연장과 군부대로 콘텐츠를 배급했다. 지난해부턴 세종학당에 배급, 전 세계 83개국에서 예술의전당이 제작한 공연 영상을 보고 있다.
2020년에 접어들어 코로나19를 마주하며, 공연계는 예술의전당 등 국공립 기관과 단체, 민간 제작사를 통해 활발한 영상화 실험을 이어왔다. 관객과 만날 무대가 사라진 예술인들과 공연계 종사자들의 타계책이었던 공연 영상은 지난 3년 사이 OTT, 영화관 등과 연계해 영상 노출 창구를 확장, 새로운 활로를 찾아가고 있다.
‘공연 영상계’의 맏형 격인 예술의전당에선 국내 공연장 최초로 영상 스튜디오를 구축, ‘공연 영상화’ 사업의 새 전기를 열고 있다. 예술의전당 공연 영상 스튜디오 실감은 지난해 12월 완공, 올해 6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선 매주 한 편씩의 자체 영상물이 제작되고 있다. 문 부장은 “이 스튜디오는 예술의전당 영상 사업의 마침표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예술의전당 공연 영상 스튜디오 실감은 지난해 12월 완공, 올해 6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선 매주 한 편씩의 공연 영상물이 제작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
스튜디오는 45평 규모로 50~60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는 물론 댄스팀, 소규모 앙상블까지 촬영이 가능한 종합 촬영장부터 유튜브·네이버TV·카카오TV 등 온라인 플랫폼으로 실시간 송출이 가능한 조정실, 음향 후반 작업실, 색보정 작업실, 편집실이 자리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 편집 과정엔 ‘필수’이지만, 공연 영상 제작에선 생소했던 ‘색 보정실’이 생긴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문 부장은 “공연 영상에선 색 보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낯설었지만, 이제는 제작에 있어 완성도의 기준점도 높아지게 됐다”고 말했다.
장비 역시 ‘국내 최고’ 수준이다. 스튜디오에선 영화 촬영에 쓰는 소니 풀프레임 6K 센서 카메라를 사용한다. 예술의전당의 경우 이미 지난 2013년 ‘싹 온 스크린’을 시작할 당시부터 영화 촬영용 카메라를 사용했다. 문 부장은 “스튜디오 안의 모든 기자재는 상업영화의 작업 퀄리티로 갖춰진 상태”라고 귀띔했다. 공연을 다루는 스튜디오에서 ‘영화 촬영 수준’으로 장비가 갖춰진 곳은 현재로선 이곳뿐이다.
예술의전당의 공연 영상 스튜디오 실감은 예술가들의 영상 제작 지원과 스튜디오 대여도 겸하고 있다. 이곳에서 촬영된 영상은 예술의전당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되기에 송출 채널까지 제공된다. 이 공간이 공연 영상 콘텐츠 확장의 발판이 되고 있는 셈이다.
예술의전당의 공연 영상 스튜디오 실감 [예술의전당 제공] |
■ 공연 영상 A TO Z…촬영부터 송출까지
공연 영상의 촬영 과정과 방법은 장르와 장소마다 다르다.
예술의전당의 경우 클래식 공연을 여는 콘서트홀(음악당)의 벽과 천장에 9대의 카메라가 설치돼있다. “연주자들은 고정된 위치에서 연주를 하기에”(문성욱 부장) 리모트 카메라를 중심에 두고, 필요에 따라 이동식 카메라로 촬영을 병행한다.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는 발레나 오페라 등은 작품에 따라 편당 10~15대의 카메라가 투입돼 생생한 ‘현장 예술’을 담아낸다.
공연 영상을 촬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연에 대한 높은 이해도”다. 문 부장은 “영화의 경우 짧게 끊어서 찍는 반면 연주 영상의 경우 한 악장만 해도 5~10분, 한 곡은 30~40분이 걸리기에 찍는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많다”며 “예술의전당의 공연 영상은 영화 장비와 기법을 쓰지만, 촬영에 참여하는 모든 스태프가 공연적인 마인드에서 접근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스튜디오 촬영에선 공연 영상이 아닌 만큼 다양한 각도에서의 촬영을 시도하고, 조명도 과감하게 사용한다. 스튜디오 촬영시 염두하는 것은 “아름다운 영상”의 제작이다. 같은 클래식 연주 장면을 담는다 하더라도 영화와 공연 영상은 접근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한경서 PD는 “영화의 경우 배우의 얼굴 표정을 통한 감정 전달을 담아낸다면, 클래식 영상은 연주하는 피사체 위주로 촬영하되, 감정을 빼고 객관적으로 관망하듯 담아낸다”고 말했다.
클래식 음악 영상의 촬영에선 “생생한 영상과 음향”이 관건이다. 한 PD는 “연주자들의 영상 촬영애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부분은 고품질 음향 녹음과 고화질 영상 녹화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튜디오 실감은 45평 규모로 50~60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는 물론 댄스팀, 소규모 앙상블까지 촬영이 가능한 종합 촬영장부터 유튜브·네이버TV·카카오TV 등 온라인 플랫폼으로 실시간 송출이 가능한 조정실, 음향 후반 작업실, 색보정 작업실, 편집실이 자리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
음향과 영상을 동시에 잡기 위해, 연주자들은 수차례 녹음을 진행한다. 예술의전당에선 ‘이머시브 사운드’(돌비 애트모스 7.1.4 채널)로 제작한다. 콘서트홀에는 메인 스피커가 24대, 오페라극장엔 14대가 설치돼있다. 마이크도 각각 40대 이상이 설치돼있다. 관계자들은 “음향은 국내에서 따라올 곳이 없다”고 자부한다. 과거 공연 영상은 “오디오에 있어 현장감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컸으나, 이제는 오디오가 현장감이 다소 떨어질 수 있는 공연 영상의 단점을 채워주는 역할”(문성욱 부장)도 하고 있다.
공연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뒷자리에선 볼 수 없던 세밀한 동작을 가깝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보고 싶은 것’이 아닌 ‘봐야하는 장면’을 ‘지정’해주는 것은 단점이기도 하다. 잘 만든 공연 영상은 연주자, 연기자, 지휘자 등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문 부장은 “연주 영상이라면, 지금 이순간 어디를 비춰야 하고 지휘자·연주자가 어느 파트를 보여주기를 원하는지 파악해 세밀하게 프로듀싱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촬영을 마치면 본격적인 후반작업에 돌입한다. 짧게는 한 달, 평균 석 달이 걸린다. 실내악단 노부스 콰르텟은 음반 녹음과 촬영을 함께 진행, 영상이 나오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녹음 과정만 7번을 진행했다. 모든 제작 영상은 음향 후반 작업, 색보정 작업, 편집 등의 과정까지 거쳐야 완성본으로 태어난다. 에메트 앙상블의 영상은 올 12월이나 내년 초 공개될 예정이다.
에메트 앙상블 [예술의전당 제공] |
■ 공연계의 ‘미래 먹거리’…예술가에겐 기회, 온라인 관객·공연장의 선순환
‘공연 영상화’ 사업은 국내 공연계의 ‘미래 먹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의 시행착오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성공 가능성을 확인했다. 10여년 전 시작,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메트: 라이브 인 HD’나 영국 국립극장의 ‘NT 라이브’는 공연 영상 시장의 롤모델이다.
공연 영상 제작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문 부장은 “공연 영상은 현장 공연과 영상 사이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무엇”이라며 “공연 영상 자체로 완성도를 높여 충분히 존재 이유가 있는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공연 영상을 통해 사람들을 공연장으로 오게 만드는”(문성욱 부장) 선순환 구조를 다지는 것은 공연 영상화 사업의 목표 중 하나다.
잘 만든 영상은 예술가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공연 영상은 관객 확장의 창구이자, 관객들과의 소통 방식이 되고 있다.
성미경은 “공연 영상의 제작은 평소 클래식을 즐기지 않았던 새로운 관객 층이나 젊은 세대에게 클래식을 노출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며 “SNS나 유튜브를 사용하는 일반 대중이 함께 볼 수 있는 유니크하고, 색다른 방식의 연주 영상을 통해 클래식을 친근하게 알릴 수 있어 중요한 시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잘 만든 영상은 예술가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공연 영상은 관객 확장의 창구이자, 관객들과의 소통 방식이 되고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장르를 막론하고 공연 영상 제작은 ‘진입 장벽’이 높다. 한 편의 영상을 제작하고 송출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소규모 연주단체와 예술가들은 시도조차 쉽지 않다. 성미경은 “뮤직비디오처럼 촬영한 영상을 꾸준히 제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사실 영상 제작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든다”며 “클래식은 어디에서 연주하느냐도 중요해 홀을 빌리거나 실내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장소를 찾기도 마땅치 않고 비용 부담이 커, 지원 사업이 아니라면 제작이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공연 영상 콘텐츠 유통은 플랫폼 사업자가 시장을 독식하고 있어 플랫폼 사용료와 수익료 분배, 수수료 비율이 상당히 높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영상의 분량, 시간에 따라 사용료와 수수료도 달라진다”며 “대형 포털사이트의 플랫폼에선 최대 40% 이상까지 수수료를 떼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플랫폼에선 미리 사용료를 지급한 뒤 이후 수익을 나누는 방식으로 계약을 맺는다.
업계에선 “제작된 영상의 수익성이 담보되지 않았기에, 영상 촬영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해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코로나19 이후 ‘공연 영상’이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모델로 제시됐으나, 현실은 다르다는 것이다. 문 부장은 “현재는 공연 영상에서도 양극화가 심해 수익을 내는 것은 어려운 환경이라는 점을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며 “다만 영상 제작의 측면에선 비용을 지불하고서도 볼 수 있는 퀄리티의 공연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예술의전당은 제작 영상을 공개할 수 있는 ‘자체 플랫폼’도 구축 중이다. 문 부장은 “예술의전당 공연 영상을 편안하게 시청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다”며 “추후 다른 단체의 공연 영상까지 제공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상반기 테스트를 진행하고, 하반기엔 오픈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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