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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핍·갈망·다양성…새로운 전통 K-뮤직, 세계에서 날다
악단광칠, 이날치, 해파리, 잠비나이…
전통음악 기반 K-뮤직 세계에서 훨훨
월드뮤직 장르 중 톱클래스 평가
 
1980년대부터 실험과 도전 시작
대중성 결핍으로 인한 콤플렉스
새로운 시도 향한 욕구와 갈증
K-뮤직 성장의 가장 큰 동력
  
뛰어난 예술성ㆍ티켓파워 확인
“그 어떤 장르보다 글로벌한 장르될 것”

전통의 울타리 안에 있던 한국음악이 국제 무대에서 날개를 달고 있다. ‘전통’을 기반으로, ‘전통’의 경계를 넘어선 이들이다. 악단광칠을 비롯해 고래야, 블랙스트링, 이날치, 잠비나이, 해파리 등 새로운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밴드가 주축이 되고 있다. 사진은 악단광칠, [악단광칠 SNS]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영정 마누라 내다 불고, 비단바람 디려나 불고, 물결같이 살펴주고 도와를 줄 때, 잘 받아놔요, 드는 삼재 업 삼재요, 나는 삼재 재수야 삼재로, 천하영정 지하영정, 영정마누라 영정각시.” (악단광칠, ‘영정거리’ 중)

한국인조차 생경한 주술 같은 노랫말(악단광칠)이 세계를 점령했다. 유럽에선 판소리(입과손스튜디오)로 떼창하고, 가야금 거문고(달음)가 매혹적으로 울려 퍼진다. 전통악기가 어우러진 포스트 모던록(잠비나이)은 방탄소년단(BTS)이 출연한 미국 메이저 음악 방송(NPR ‘타이니데스크’)을, 종묘제례악(해파리)은 북미의 음악 축제를 발칵 뒤집어놨다.

전통의 울타리 안에 있던 한국음악이 국제 무대에서 날개를 달고 있다. ‘전통’을 기반으로, ‘전통’의 경계를 넘어선 이들이다. 악단광칠을 비롯해 고래야, 블랙스트링, 이날치, 잠비나이, 해파리 등 새로운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밴드가 주축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 전통을 기반으로 한 음악의 새로운 시도가 폭발적 관심을 받은 것은 2020년이다. ‘1일 1범’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유튜브를 강타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으로도 제작되며 누적 조회수 5억회를 넘기면서다. 국내에선 ‘새로운 전통’에 열광했고, 해외에선 소위 ‘K-뮤직(한국음악)’에 홀렸다.

국악계 바깥의 시선으론 “팬데믹 시대에 난데없이 터진 신드롬”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사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일들의 성과”라고 업계에선 입을 모은다.

전통음악의 세계 무대 진출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 전통음악의 국제교류가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김희선 국민대학교 교수는 “1960년대는 국악의 현대화, 1980년대는 국악의 대중화, 현재는 국악의 세계화 등 시대마다 형태와 지향은 다르지만,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국제 무대를 두드려왔다”고 말했다.

2020년 ‘1일 1범’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범 내려온다’의 주인공 이날치 [LG아트센터 제공]

■ 결핍·갈망·다양성…‘새로운 전통’의 시작

지금의 국악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낡고 오래된 것’, 그래서 ‘지루하고 고루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진작에 벗었다.

1980년대부터 대중음악과의 ‘접선’을 시도한 국악은 1990년대 안숙선, 김덕수 명인의 ‘레드선(Red Sun) 프로젝트’부터 시작해 푸리, 공명, 바람곶 등 다양한 밴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후반 황신혜밴드, 어어부프로젝트 등 국악의 정서를 받아들인 홍대 인디신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나왔다. 2010년대에 접어들며 전통을 대중음악과 접목한 잠비나이, 고래야 등 달라진 세대와 함께 국악은 도전과 실험을 이어갔다. 판소리는 팝(이날치), 잡가는 재즈(이희문)와 만나 재해석됐고, 무가는 록(악단광칠)으로 태어났다.

새로운 시도의 원동력이 된 것은 ‘결핍과 갈망’, ‘다양한 음악 장르의 유입’이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이후 국악계의 새로운 세대에겐 일종의 ‘콤플렉스’가 자리했다. “대중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음악을 하고 있다”는 콤플렉스, “아무리 해도 인기를 얻지 못한다”는 트라우마였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욕구와 갈증, 대중이 외면하는 전통에서 벗어나 새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추동 엔진 역할을 했다. 김희선 교수는 “소통에 대한 강한 욕망과 창작 의지는 한국음악 발전의 큰 원동력이자 주요한 동기가 됐다”고 봤다.

악단광칠의 보컬 홍옥은 “국악이 소외된 시절부터 우리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예술가를 고민한 끝에 악단광칠이 나오게 됐다”며 “우리 음악으로 자립할 수 있는 팀을 만들어보자는 노력 끝엔 생존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말했다. 예술가들의 생존 본능과 동시대화에 대한 욕망은 ‘새로운 전통’을 탄생시킨 큰 힘이었다.

여기에 2000년대에 접어들며 인터넷의 발달로 다양한 음악 장르가 유입되자, 이들에게도 신세계가 열렸다. ‘월드뮤직의 개념’이 들어왔고, 지구상에 다양한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국의 전통음악을 현대화하는 작업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목도하며, 전통음악의 재해석은 보다 자신감을 얻었고, 더욱 활발해졌다.

전통의 울타리 안에 있던 한국음악이 국제 무대에서 날개를 달고 있다. ‘전통’을 기반으로, ‘전통’의 경계를 넘어선 이들이다. 악단광칠을 비롯해 고래야, 블랙스트링, 이날치, 잠비나이, 해파리 등 새로운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밴드가 주축이 되고 있다. 사진은 악단광칠, [악단광칠 SNS]

■ 새로운 활로 찾아 세계로…해외 진출의 시작과 의미

음악인들의 시도와 노력이 무색하게도 국내 시장은 작았다. ‘한국 음악시장’ 자체의 규모도 작은데, 그 안에서 전통음악이 설 수 있는 무대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전통음악이 K-뮤직 반열에 오르는 과정이 필연적이었던 이유다.

김희선 교수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월드뮤직이라는 새로운 장이 열리며, 각 지역의 전통음악이나 그것에 기반한 대중음악을 포괄하기 시작했다”며 “월드뮤직 마켓이 생겨 시장이 판도가 달라졌고, 한국의 전통음악 역시 월드뮤직의 카테고리에 들어서며 세계 시장에 진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예술경영지원센터를 통한 국제교류 형식의 초청 등 민관의 다양한 지원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음악이 월드뮤직 시장에서 두각을 보인 중요한 사건은 2010년 세계 최대 월드뮤직 페스티벌로 꼽히는 워맥스(WOMEX, World Music Expo)였다. 당시 오프닝 무대에서 토리 앙상블, 바람곶, 비빙이 합동무대를 선보이며 ‘한국음악 신고식’을 치렀다. 현재 세 팀은 사라졌지만, 이들의 DNA는 또 다른 곳에 뿌려져 만개했다.

김희선 교수는 “워맥스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이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글로벌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밴드를 만들어 그 경험을 공유하고 전승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봤다.

비빙의 장영규는 씽씽에서 이날치로, 바람곶의 허윤정은 재즈와의 접목을 시도한 블랙스트링으로 이어졌다. 2004년 결성된 바람곶은 원일(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박순아, 이아람(블랙스트링, 나무), 박우재(무토), 박재록을 멤버로 했다. 장영규는 현재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원일 예술감독과 황신혜밴드, 어어부프로젝트를 함께 했다.

창작 국악그룹 비빙으로 활동, 2010년 세계 최대 월드뮤직 페스티벌로 꼽히는 워맥스(WOMEX, World Music Expo)에 참가한 천지윤은 “당시와 달리 지금은 해외 투어 트렌드도 달라졌고, 연주자들이 서는 무대도 세분화돼 록페스티벌에 전통음악 기반의 음악가들이 서기도 한다”고 말했다.[국립극장 제공]

비빙의 멤버로 활동한 해금 연주자 천지윤은 “비빙이 활동하던 당시는 새로운 무대를 찾고 새로운 관객을 만나고자 하는 흐름 안에서 실험하고 도전하는 예술가들이 해외로 향했다”며 “2010년대 초반과 달리 지금은 해외 투어 트렌드도 달라졌고, 연주자들이 서는 무대도 세분화됐다. 록페스티벌에 전통음악 기반의 음악가들이 서기도 한다”고 말했다.

‘K-뮤직의 이정표’를 찍은 선두주자들을 잇는 후배 밴드의 활동은 더 다양해졌다. 전통음악 기반의 밴드에게도 해외 무대는 “조금 더 자유롭고 반가운 무대”(고래야 경이)다. “밴드의 활동 반경이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고래야는 2012년 벨기에의 월드뮤직 페스티벌(‘Sfink Mixed’)로 첫 해외공연을 가졌다. 이를 발판 삼아 유럽, 북미 지역으로 무대를 확장했다. 2021년 미국 유명 라디오 방송인 NPR ‘타이니 데스크’(2021년)에도 출연했다. 오는 10월엔 멕시코의 음악 축제에 초청, 현재는 투어 준비에 한창이다.

2017년 민요 기반의 씽씽이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NPR ‘타이니 데스크’에 출연한 이후 K-뮤직은 보다 큰 무대로 나아갔다. 새 활로를 찾고자 했던 악단광칠은 2018년 주 앨살바도르 한국 대사관 초청 연주를 시작으로 다양한 해외 음악 관계자를 만나게 됐고, 2019년 마침내 ‘워맥스’ 무대에 섰다. 올해에도 북미, 유럽 투어를 진행했다. 잠비나이는 미국 코첼라, 영국 글래스톤베리, 스페인 프리마베라 사운드, 프랑스 헬페스트, 미국 세계 최대 음악 산업 축제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이하 SXSW)에도 참가했고, 지난해엔 ‘타이니 데스크’에 출연했다. 박민희가 소속된 해파리도 최근 SXSW에 참가했다. 판소리 창작 집단 입과손스튜디오도 지난달 벨기에에서 무대를 가졌고, 오는 10월엔 멕시코 세르반티노 축제 무대에 오른다.

미국 공영 라디오 간판 음악 프로그램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출연한 잠비나이(왼쪽부터 유병구(베이스), 김보미(해금,보컬) , 최재혁(드럼), 이일우(기타,피리,태평소,생황,보컬), 심은용(거문고,보컬) [더 텔 테일 하트 제공]

■ 티켓 파워·뛰어난 예술성…‘청신호’ 켜진 K-뮤직

세계 무대로 나간 이들의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한국음악 밴드의 해외 진출을 지원해온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에 따르면 유럽 등 세계 무대의 ‘월드뮤직’ 신에선 한국의 전통음악 기반 밴드와 새로운 밴드 데뷔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관계자는 “세계 무대에선 완전히 새로운 음악인 한국음악의 높은 예술적 수준과 한국음악 밴드를 통한 티켓 파워, 음악팬의 반응을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악단광칠에게 따라 붙는 ‘코리안 샤머닉 펑크’, ‘K-포크팝’도 해외 팬들이 붙여준 수사다.

K-뮤직이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신선함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선 ‘우리만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김약대 악단광칠 단장은 “해외에서 국악이 의미 있는 반응을 일으키려면 기존 음악을 이해하고 있는 대중의 인식에 들어가야 하고, 그 인식 안에서 우리의 음악적 정체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제 무대에서 선보이는 K-뮤직은 이러한 필요조건을 담보, “뛰어난 예술성을 가진 장르”(김희선 교수)로 평가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있는 시선을 보내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김약대 단장은 “현지에선 우리 음악의 의미와 굿에 대한 의미, 복색과 심지어 ‘한’이라는 정서에도 관심을 보낸다”고 말했다. ‘젊은 판소리’를 지향하는 입과손스튜디오는 유럽 무대에서 판소리에 대해 달라진 인식을 확인했다. “이날치와 입과손스튜디오의 판소리는 어떤 점이 다른 것 같다”는 분석까지 한다. 이향하 입과손스튜디오 대표는 “이전에는 판소리가 한국에서 온 낯설고 신기한 장르로 비쳤다면 지금은 유럽 내에 ‘판소리 신’이 생길 만큼 저변이 확대되고, 조금 더 진하고 깊이 있게 장르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2017년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NPR ‘타이니 데스크’에 출연한 민요 록밴드 씽씽은 한국남자, 오방신과로 활동하고 있는 소리꾼 이희문, 이날치의 장영규, ‘추다혜 차지스’의 추다혜, 입과손스튜디오 신승태가 주축이 된 팀이었다. 현재는 해체했다. [이희문컴퍼니 제공]

K-뮤직의 가장 큰 호재는 지금이 바로 ‘한국문화의 전성기’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K-팝, K-드라마, K-무비 등 그 어느 때보다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이들 역시 체감한다. 이향하 대표는 “K-팝이나 드라마, 영화 등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판소리 등 한국음악으로도 이어지고 있고, 그 수혜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음악계에선 여전히 새롭고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오래되고 진부한 음악이었던 K-뮤직은 세대를 거쳐온 음악가들을 통해 ‘도전과 실험’의 선두에 선 음악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장 낡은 줄 알았던 음악은 가장 ‘최신의 음악’이 되고 있다.

김약대 단장은 “지금은 새로움에 대한 수위가 높아지고, 다양한 시도가 보다 활발해지고 있다”며 “이젠 재해석의 시도를 넘어 동시대 사람들에게 재해석의 결과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때”라고 봤다. 천지윤도 “2008~2009년만 해도 국악을 통한 새로운 시도에 대한 논쟁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며 “지금은 전통음악이 대중적 어법을 가지고 대중문화에 흡수되는가 하면, 재미있는 코드를 넣으며 엄숙주의를 넘어섰다. 과감한 것이 과감한 것이 아닌 것이 되는 때가 됐다”고 봤다.

한국음악은 오늘보다 내일의 전망이 더 밝다. 앞으로의 진출기에도 청신호가 켜진다. 김희선 교수는 “플랫폼이 다양해지며 한국음악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창구가 늘었고,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며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성을 띠는 K-뮤직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글로벌한 장르가 되리라 본다”고 내다봤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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