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지난 5월 20일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열린 행사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게티이미지]

[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 “시장(중국)이냐 기술(미국)이냐”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동맹 ‘칩(Chip)4’에 한국이 참여를 고심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계 주요 기업들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기업들은 미국과 중국 간 이어지는 무역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한쪽도 쉽게 선택하거나 포기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 내달 말까지 ‘칩4’ 참여 여부를 알려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칩4’는 미국이 한국, 일본, 대만 등에 제안한 4개국 반도체 동맹이다.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안정적인 역내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경제안보 전략인 셈이다. 중국을 국제 반도체 공급망에서 고립시키고 4개국 공급망을 더욱 탄탄히 하겠다는 의도다. 동맹이 완성되면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출규제 등의 수단들을 확보하는 것이 더 용이해질 수 있다.

미국은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기술, IP(지적재산)들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반도체 제조사를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 소재 분야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으며 대만은 TSMC와 같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회사가 있다. 4개국의 기술, 인프라, 생산, 시장 등의 공조가 유연하게 이뤄질 수도 있다는 것이 칩4를 제안한 미국의 속내다.

당장 견제를 받는 중국은 미국이 ‘협박 외교’를 통해 한국의 참여를 압박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계열 환구시보와 영문판 글로벌타임스는 지난 21일자 사설에서 “한국은 미국의 위협에 맞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최대 시장이자 전 세계 최대 시장”이라며 사실상 참여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삼성전자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전경. [삼성전자 제공]

한국 반도체 수출은 1280억달러로 이 가운데 중국 수출 비중은 60%에 달해 미-중 간 무역전쟁이 심화할 경우 수출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중국 시안과 우시 지역에 팹(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정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고민이 될 것”이라며 “중국은 최대 시장이고 미국은 기술이 있다. 기술이 없다면 경쟁력을 잃고 시장이 없다면 기술도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다만 중국의 경우 반도체 굴기를 통해 기술 내재화를 추진하고 있어 스마트폰, 가전 등의 시장에서 내수 영향력을 확대한 것처럼 반도체의 경우에도 자국 기업이 점유율을 확대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SK하이닉스 중국 우시 반도체 공장 전경. [SK하이닉스 제공]

이런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미국의 압력도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 육성 법안의 입법을 추진 중인데 내주 중 통과 가능성이 높다. 미국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는 것이 주된 골자지만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반도체법에는 세금 감면 등 미국 투자 지원 방안도 있지만 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내용도 담고 있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 있다.

최대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의 2000억달러 규모 장기 투자계획이 공개된 것도 미국과의 장기적 관계를 통해 결정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미국 현지 언론 등은 삼성전자의 세금 감면 신청서를 공개하며 텍사스주 테일러 신공장 9곳에 1676억달러(약 220조4000억원), 오스틴 신공장 2곳에 245억달러(약 32조2000억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보도하기도 했다. 텍사스주는 챕터313 세금 프로그램에 따라 대규모 일자리 창출 기업에 10년 간 재산세 감면 혜택을 주는데 올해 만료가 된다. 삼성전자는 1921억달러를 투자해 1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170억달러를 투자해 테일러시에 신규 팹을 짓고 있다.

삼성전자는 추가 투자를 확정한 것이 아니고 중장기 구상일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성명을 통해 “새 공장들이 텍사스가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의 리더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면서 “투자를 늘린 데 대해 삼성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키를 잡은 한국 정부는 국익에 우선해 결정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이다. 정부가 칩4 참여에 앞서 미국에 우리 조건을 역제안할지도 주목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반도체 산업만 놓고 보진 않을 것”이라며 “자동차, 철강 등 다른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 경제 뿐 아니라 외교·안보 문제까지 고려한 판단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