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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시사] 영화 ‘공조’가 등장할 때다

2019년 11월 7일 이뤄진 북한 어민 강제 북송은 정부 수립 후 북한 주민이 강제 송환된 최초 사례다. 그만큼 이례적인 사건인지라 정치적 공방이 격렬하게 맞붙고 있다. 고발된 정의용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이들(탈북어민들)은 그냥 사람 한두 명 죽인 살인범이 아니라 희대의 엽기적인 살인마들”이라며 “이들은 범행 후 바로 남한으로 넘어온 것도 아니다. 애초 남한으로 귀순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라며 “우리 국내법도 이런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자는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북송 과정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권성동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흉악범이더라도 귀순 의사를 밝힌 이상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고 범죄 혐의를 조사했어야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5일 만에 사지로 내몰았다”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살인과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탈북민이라도 귀순을 요청하면 우리가 품어야 하나, 아니면 강제로 북송해야 하나? 정치적으로는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오직 ‘국내법’ 해석으로만 접근하면 당시 정부의 결정은 위법 소지가 매우 크다.

우선 국내법에 살인과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탈북민을 강제로 추방하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근거로 들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법은 이탈주민을 지원하느냐 안 하느냐의 기준이지, 송환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니다. 더욱이 통일부에 따르면 탈북해 귀순한 북한 주민 가운데 마약·테러·집단살해 등 북송 어민 못지않게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가 무려 23명이나 되지만 그들은 강제 북송되지 않았다. 국내법으로는 탈북민은 별도의 귀화 절차 없이 바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하고, 우리 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정 전 실장은 “이들이 합동 신문 과정에서 귀순의향서를 제출했다”고 인정하면서도 “나포된 후 동해항으로 오는 과정에서 귀순 의사를 밝히지 않아 진정성이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통일부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이들은 북송 과정에서 발버둥치는 등 석연찮은 장면이 등장한다.

판도라 상자는 열렸다. 탈북민 강제 북송이라는 전례 없는 사건이 전 국민에게 공개됐다. 아마도 누군가는 기소될 것이고, 재판과정에서 당시 벌어졌던 정부의 판단이 더 많이 공개될 것이다. 현 정권이 강조하듯이 문재인 정부의 반인권적인 처사가 드러날지, 당시 정부 판단이 통치행위로서 정당성을 인정받을지 현재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또다시 살인 등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탈북한 북한 주민이 귀순한다면 현 정부는 기꺼이 우리 구성원으로 받아들인 것인가. 많은 국민이 불안해하는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흉악범 프레임으로 북송을 정당화하는 야권의 일부 주장도 상당히 불편하다. 헌법을 바꾸지 않는 한 탈북민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그들에게도 무죄추정 원칙·적법 절차와 같은 우리 사법 시스템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북한보다 사법 체계가 월등히 인권친화적임을 증명할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이번 사건이 단순히 사법 판단으로 끝나게 되면 커다란 정치적 후유증만 남길 가능성이 있다. 보다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되기를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우리 곁에는 3만3000명이 넘는 탈북민이 존재한다. 사회통합을 위해서라도 탈북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돼야 한다. 또한 탈북민 귀순 의사의 객관성 확보도 중요하다. 그들에게도 변호인 조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남북 간에 형사사법 공조(비정치적 범죄인 인도 등)가 이뤄지는 창구가 마련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는 어디서든 처벌을 받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영화 ‘공조’가 현실에서도 등장할 때가 됐다.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poo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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