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팝업스토어의 성지’로
트렌드와 재미 찾는 MZ 놀이터
코로나19 더 강력한 아날로그 요소 갖춰
단일 상품·스토리·인스타그래머블
임대료 치솟으면서 대기업 중심 변모 우려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서울 제조업의 심장.’ 그러니까 불과 50년 전,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대한 이야기다. 무채색의 공장지대와 빨간 벽돌집이 촘촘하게 들어선 이곳은 1970년대만 해도 서울을 대표하는 공업지역이었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 가로변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됐지만 낙후된 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선 시간의 더께가 쌓인 영세한 공장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멈춰섰다.
하지만 최근 달라졌다. 주인 잃은 공장과 버려진 창고에서 이름 모를 디자이너의 패션쇼가 열리는가 하면 빛바랜 시멘트 벽은 신진 작가의 갤러리로 변신했다. 낡은 주택들은 개성 넘치는 카페로 탈바꿈했다. 저렴한 임대료를 등에 업은 예술가가 성수동에 몰리면서다. 그렇게 성수동은 몇 년 사이 ‘힙한 동네’로 변모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상권 성장세가 주춤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올해 4월부터 소위 ‘뜨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제 성수동은 당신을 프랑스 파리 몽테뉴가로, 영국 본토에서 보낸 죄수들이 모인 19세기 호주로, 푸른 지구를 내려다보는 어둠 속의 우주 등으로 데려가는 동네다. 급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순발력 있게 콘셉트 매장을 운영하고 싶은 기업과 브랜드가 경쟁적으로 팝업스토어를 열면서다. 이렇다 보니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인해 그야말로 디지털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더 강력한 아날로그를 경험하기 위해 성수동을 찾고 있다. 바야흐로 트렌드와 재미가 집요하게 모인 성수동은 ‘팝업스토어의 성지’가 됐다. 특히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이 시작되고 나서 벌어진 일이다.
3일 디올 성수 팝업스토어 앞에서 사진을 찍는 20·30세대 모습 [이정아 기자] |
일요일인 3일 오후 2시, 34도를 웃도는 찜통 더위에도 디올 성수 팝업스토어가 들어선 골목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20·30대로 북적였다. 낡고 오래된 건물 사이에 들어선 느닷없는 프랑스 파리에, 콘텐츠에 목말랐던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인증샷을 남겼다. 디올이라는 브랜드의 정체성과 맞물린 화려하고 웅장한 공간의 자태에 특히 이곳에서는 ‘우와!’하는 감탄사가 연신 들렸다. 디올은 지난 5월 명품이 집중된 유통상권에서 벗어난 성수동에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기존의 명품 업계의 논법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또 다른 성수동 좁은 골목길, 붉은 벽돌 건물에 들어선 KBO 팝업스토어에는 4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야구장 인조잔디가 깔린 4평 남짓한 공간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찍은 사진을 인화물로 받기 위해서다. 티셔츠부터 가방까지 KBO 굿즈를 말 그대로 쓸어 담는 고객들도 눈에 띄었다. 호주 와인 브랜드인 19 크라임스가 문을 연 팝업스토어에는 MZ세대에게 인기가 높은 방탈출 게임을 직접 해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구성됐다. ‘여름 바다’ 콘셉트로 오픈한 아모레퍼시픽의 클린뷰티 브랜드인 프리메라의 팝업스토어에서는 비치게임을 하고 신상품을 체험하는 공간이 마련됐다. 뙤약볕 아래서 무더위를 참으면서도 팝업스토어 공간을 즐기는 MZ세대를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3일 KBO 성수 팝업스토어 내 더그아웃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는 20·30세대 모습 [이정아 기자] |
3일 배달의민족이 문을 연 ‘당신의 일 고민을 삽니다’ 성수 팝업스토어 [이정아 기자] |
패션·뷰티·식음료(F&B) 등을 망라한 성수동 팝업스토어의 공통점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상품력을 갖춘 단 하나의 단일 상품을, 상품 스토리나 브랜드 세계관과 연결해, 체험 요소와 비주얼 감각을 극대화 한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하다)’ 공간으로 구성했다는 점이다. 이날 방문한 11곳의 팝업스토어는 “놀이가 곧 소비고, 소비가 곧 나 자신”을 말하는 MZ세대의 가치관을 집요하게 파고든, 말 그대로 ‘마케팅 집약체’였다.
특히 짧게는 하루, 길게는 두 달 동안 임시로 운영하는 팝업스토어는 최신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해 MZ세대에게 끊임없이 흥밋거리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제격인 형태다. 새로 출시된 상품과 브랜드를 마케팅하는 기업·브랜드로서도 한시적으로 여는 매장으로 공간을 기획할 수 있어서 플래그십 스토어보다 운영 부담이 적다.
3일 아더에러 팝업스토어 내 우주를 떠올리는 오브제가 설치된 공간 [이정아 기자] |
3일 19 크라임스 성수 팝업스토어. 아일랜드를 억압하는 영국 정부에 맞서 투쟁하다가 호주로 강제 이송돼 새로운 삶을 개척한 실존 인물들의 저항정신을 브랜드 스토리로 녹인 공간. [이정아 기자] |
앱솔루트 성수 팝업스토어. 요요진 작가와 컬래버레이션 한 공간. [이정아 기자] |
실제로 성수동에 문을 연 팝업스토어는 인생네컷, 아트전시, 방탈출 게임 등 지금의 인기 콘텐츠가 기업·브랜드의 ‘핵심 상품(Key Product)’ 스토리와 연계돼 있었다. 프랑스 파리, 19세기 호주, 여름 바다, 야구, 우주 등 다양한 콘셉트의 공간이 전시, 게임, 쇼 등의 형태로 뿜어져 나오다 보니 재미 요소가 극대화됐다.
한편 성수동 상권에 대한 선호도가 커지자 임대료도 치솟고 있다. 알스퀘어 자료에 따르면 근처 임대료는 2020년 ㎡당 1분기 3만8800원이었던 것이 2022년 3분기 4만4000원까지 2년 사이에 13% 넘게 올랐다. 임대료와 더불어 권리금은 더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는 게 인근 공인중개업소들의 설명이다. 이로 인해 몇 년 전만 해도 신생 브랜드와 개성 있는 아티스트 중심으로 떠오른 성수동이 빠른 속도로 대기업 중심의 브랜드 론칭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7월 중 성수동 일대에서 팝업스토어를 여는 브랜드 가운데 60% 이상이 최소 연매출(거래액) 1조원을 넘어선 기업의 신생 브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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