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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머니 막춤도 예술...인간, 좀 이상해져도 괜찮아”
파격·도발...현대무용가 안은미·김혜경
20년전 스승과 제자로 만나 무용실험 함께
전라의 춤 ‘강박’ 벗어던진 자유, 창작의 시작
안은미 “이유없는 시도는 단 하나도 없어”
무용수 근육·체형에 맞는 안무로 트레이닝
김혜경 “나에서 출발...타자·인간·사회로 확장
소통·설득 과정의 연속...모든 것이 다 격변”
현대무용가 안은미(왼쪽)의 이름 옆엔 파격, 도발, 실험과 같은 말들이 따라 다닌다. 그의 춤과 무대를 설명하기엔 ‘언어의 역량’이 부족하다. 낯선 현대무용을 친근하게 가져오고, 그 안에서 신선한 재미를 던져놓는다. 그의 유산은 안은미의 뒤를 잇는 살아있는 불꽃’으로 불리는 김혜경으로 이어진다. 임세준 기자

춤을 춘다. 두 팔을 올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여린 나무들처럼. 조용필의 ‘모나리자’에 맞춰,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에 맞춰, 그렇게 춤을 춘다. 시골 마을 어딘가에서 일생을 보낸 할머니들이 한 명씩 무대에 올라 음악에 나를 맡긴다. 무용수들은 그 안에 어우러져 온몸의 근육을 사용하며 움직임을 더한다. 세계적인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인 안은미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다. 장애인, 외국인, 할머니, 아저씨 등 ‘무용 인류학 시리즈’의 일환인 이 작품은 그의 예술세계에서 중요한 변화의 기점이 된 작품으로 꼽힌다.

“춤은 무엇인지, 우리 시대의 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어요. 춤은 사랑이에요. 인간이 좀 이상해져도 괜찮은 것, 언어와 달리 구체적이지 않은 구조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춤이에요. 사람들은 갑자기 춤을 추면 ‘왜 저러냐’ 그래요. 왜 저러긴? 그게 본능이에요. 본능이 제어된 사회 안에서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언어가 바로 춤이에요.” (안은미)

할머니들의 움직임은 ‘막춤’이라 불렸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물었다. ‘저것이 예술이냐고’. ‘판도라의 상자’ 안에 갇힌 본능을 꺼내놓자, 그 춤은 심장을 세게 후려친다. 그들의 춤은 때때로 슬펐다. 그 안엔 한 인생이 살아온 격동의 시대와 역사가 담겼기 때문이다. 지난한 삶의 기록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사회가 용인하지 않지만, 춤을 허하면 좀 나아져요.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멋진 춤이 아니라, 나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나만의 영토를 만들어줘야 해요. 못났든 잘났든. 못나면 못난 대로 귀엽잖아요.”(안은미)

안은미의 이름 옆엔 무수히 많은 수사가 달린다. 파격, 도발, 과감한 실험.... 할머니의 ‘막춤’도 그랬다. 관습을 깨고 경계를 넘었다. 가장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단어를 붙여도 안은미 앞에선 ‘별 것’ 아닌 말이 된다. 그의 춤과 무대를 설명하기엔 ‘언어의 역량’은 부족해서다. 현대인에게 가장 멀리 있는 현대무용에 밧줄을 칭칭 감아 관객 옆으로 툭 떨어뜨린다. 안은미의 세계가 뿌린 씨앗이 울창하고 빽빽한 숲이 되고 있다. 안은미와 그의 유산 같은 친구를 만났다.

▶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탐구”...‘각자이지만 함께’하는 무용 실험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다. 트레이드 마크인 ‘빡빡머리’에 커다란 귀고리. 장난감 같은 화관을 올린 안은미. 그 옆에 ‘리틀 안은미’가 있다. ‘안은미의 뒤를 잇는 살아있는 불꽃’으로 불린다. 무용가 김혜경이다. 청량한 빨강의 샤워 가운에 색이 다른 양말을 올려 신고, 있는 힘껏 자아를 드러낸다. “얘도 이상한 애예요.” (안은미)

두 사람의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러간다. 김혜경이 대학교 2학년이던 때였다. 고등학생 때 무용잡지에서나 만나던 ‘유명한 선생님’을 특강으로 처음 봤다.

“그 때 특강에서 선생님은 ‘춤과 사람들’이라는 잡지에 실린 ‘빙빙’ 작업을 보여줬어요. 전라 상태로 밀가루에서 빙빙 돌고 있는 모습이었죠. 괴짜였어요. 괴짜인데, 그 시대에선 익숙하지 않은 괴짜. 여자가 옷을 벗는 것도, 머리를 민다는 것도 파격이던 시대였어요. 그것이 예술적 허용이 되느냐 질문을 던진 거죠.” (김혜경)

이유 없는 시도는 단 하나도 없다. 안은미는 “파격적이고 싶어 했던 시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몸이라 생각했어요. 모든 치장은 겉치레인데, 벗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출발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안은미) 그의 민머리도 그 결과물이다. ‘강박’을 벗어던진 자유로움에서 그의 창작은 시작됐다.

김혜경은 “안은미컴퍼니에서의 작업은 끊임없는 자기 탐구과 자기개발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안은미는 안무를 먼저 정하고 무용수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어울리는 안무를 개발하는 방식을 취한다.

“안은미 안무가의 스타일은 무용수들이 일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격과 캐릭터대로, 타고난 근육과 체형에 따라 개발을 하는 거예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면 그것을 버무리고 아우르는 것을 선생님께서 하세요. 각자의 캐릭터가 생긴 뒤 연습하는 과정에서 합을 맞추고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김혜경)

안은미의 트레이닝 방식은 김혜경이 그의 곁에 14년을 있게 한 이유다. “늘 다음 작품과 다음 작업이 궁금해지고, 그 안에서 달라지는 몸의 변화와 진화”가 기다려졌다.

“민주주의라는 국가 제도 안에서 합리적인 현대무용이 뭘까 고민했어요. 각자 주인이 될 수 있게 하되 조화를 이루자.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 모습이라고 생각했어요. 개성은 살리고 개인의 이야기는 들어주면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거죠. ‘각자이지만 함께’가 과연 가능할까. 그게 저의 실험이었어요.” (안은미)

그 모든 과정이 함께 하는 무용수들에겐 배움이자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내 안에 초점을 맞춰 영혼과 육신이 하나가 되도록 어둠 안에서 밝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가고 있다”고 김혜경은 말한다. 그것은 안은미가 예술가로 살아온 지난 30여년의 방식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이 그의 삶이었다.

“삶을 탐구하고, 그 안의 뿌연 진리를 찾아가는 안무가와 무용수가 되려고 노력했어요. 춤은 본질적인 에너지를 보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못해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가 중요해요. 모든 예술하는 사람이 그렇듯, 무용수도 그래서 잘 살아야 해요.” (안은미)

▶ “격변과 진화”...나에서 출발해 타자, 사회, 세계로 확장

안은미는 쉬지 않는다. 1988년 2월 ‘종이계단’을 발표한 이후 34년간 150여편을 내놓았으니, 일년에 4편 이상의 신작을 발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마르지 않는 호기심을 동력 삼아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한 발 앞서 진화”(김혜경)한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안은미는 “20대는 세상을 몰라 두리번거리다 인지하던 시기”, “30~40대는 타인의 삶 속에 뛰어들어 타자화해 바라본 시기”라고 말한다.

“난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김혜경)며 자신의 작업을 돌아보기를 거부했던 그는 세종문화회관 컨템포러리 시즌 ‘싱크 넥스트 22’에서 ‘은미와 영규와 현진’(6월 30~7월 3일·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을 통해 지난 궤적을 풀어내는 시간을 갖는다. 밴드 어어부프로젝트의 장영규 백현진과 함께 하는 무대다. 세 사람이 함께 무대를 꾸미는 것은 2003년 이후 19년 만이다. 무대에선 안은미의 초기작들을 만날 수 있다. 1995년 ‘하얀 달’, 1997년 ‘토마토무덤’, 2003년 ‘플리즈 룩 앳 미’, 2004년 ‘플리즈 캐치 미’ 등을 안은미가 공연하고, 그 사이사이 어어부프로젝트가 노래하고 연주한다.

안은미는 이 무대에 대해 “영미와 친구들이 함께 하는 공연”이자 “지난 작업을 반추하는 솔로 무대”라고 했다. 지난 10여년, 안은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본 김혜경은 “안은미 선생님은 지금도 진화하고 격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선생님의 시간은 과거부터 계속 변화가 이어오고 있어요. 아방가르드한 작업부터 시작해 전통, 인문학 시리즈, 소외계층, 소수자로 확장하고, 그 세계는 다시 아시아라는 지역으로 넘어가요. 소통하고 설득하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부딪히며 함께 춤 출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요. 이 모든 것이 다 격변인 것 같아요.” (김혜경)

‘나’에서 출발한 고민은 타자, 인간, 사회로 확장됐고, 그 안에 안은미라는 무용가의 철학과 정신이 아로 새겨졌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허물었고, 국가의 장벽을 넘었다. 2021년 신작 ‘드래곤즈’, 오는 9월 선보일 신작 ‘디어 누산타라’(9월 1~4일·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도 그 연장선이다.

“‘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자와 만나는 공간 안에서 합의점을 돌발해낼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해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 세계를 바라보고, 핵심을 담아가야 하는 거죠.” (안은미)

그는 앞으로의 작업 역시 “막혀 있는 것들의 소통, 인지도를 확장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점점 폐쇄적으로 변하는 시대, 타자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한 사회에서 우리 몸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 어떤 새로운 지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탐구하고 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춰야 할 춤이라고 봐요.”

안은미의 시선과 철학은 김혜경을 통해 이어진다. 김혜경의 ‘자조방방’(7월 12일·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은 현대무용가 김혜경의 지난 시간을 집요하게 담아낸 작업이자, “안은미컴퍼니의 변화와 진화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폐쇄적인 공간, 비대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에 대한 질문이 바로 ‘자조방방’이에요. 자조하고, 스스로 비우고 반성하고, 발전시키는 거예요. 누구도 도울 수 없는 과제를 나 스스로 해결하면서 애벌레가 언젠가는 나비가 되는 거죠.” (김혜경)

안은미는 ‘자조방방’에 대해 “갇힌 공간 안에서 해방하려는 인간의 보이지 않은 노력과 고뇌, 혼자 이겨내려는 외로움을 담고 있다”며 “인간의 몸과 물성에 대한 이해, 근육의 밀리그램까지 가지고 춤을 춘다. 김혜경이기에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했다.

“김혜경은 주옥같은 보배예요. 명무를 출 수 있는 무용수의 경지를 가고 있어 깜짝 놀라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요. (웃음) 벼랑 끝에서 모든 회오리를 다 맞아낸, 역사에 점을 찍는 춤을 출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 기대해요.” (안은미)

시각장애인과 함께 작업한 안은미컴퍼니의 ‘안심땐스’

▶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우주 탐험가...“한 번 더 선을 넘기를”

안은미는 모든 순간 항해사였고, 우주 탐험가였다.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를 찾아 두드렸다. 그는 “무대에 선다는 건 넓은 바다를 혼자 항해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무용가는 과학자와 같아요.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풀어야 하기에 우주의 보이지 않은 것을 탐구하는 것과 같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건 누군가는 꼭 해야하는 일이에요. 실수투성이인 줄 알면서도 가는 것이 인간의 역사잖아요. 한 쪽으로만 쏠리는 예술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사람도 있어야 균형감각이 생겨요. 치우치지 않기 위해 탐구하고 공부해야죠.”

현대무용은 “난해하다”지만, 그 안에 설득력을 담기 위해 시도한 세월이 길다. “어려운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있고, 쉬운 이야기는 어렵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난해한 코드를 풀고 싶어하는 사람이 봐도 즐겁도록 코드는 숨겨 두되, 네 살 짜리 아이들도 한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파격과 실험에 능통한 이 현대무용가의 철학이다.

지금의 안은미컴퍼니는 개인 무용단 중 가장 바쁜 단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디 무용계의 산증인으로 전 세계 곳곳에 ‘한국인 최초’ 공연의 깃발을 꽂았다. “인디 무용인으로 더 클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지난 30여년간 보여줬다. 다음 세대를 위해 제도와 기관 밖에서 꾸준히 ‘인디 무용가’로 건재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무용가로의 꿈도 여전히 꾸고 있다. “제가 깨닫지 못한 선을 한 번 더 넘는 것, 제 스스로 인정하고 잘 췄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길 바라고 있어요. 전 죽을 때까지 출 거니까요. 10년 뒤 언젠가 뭔가 올 것 같아요.” (안은미)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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