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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랏돈 150억 들여 만든 토종 의료기기…정작 팔 곳이 없다
적십자, 외국산 혈액선별기 도입
수백억 들여 만든 토종 제품 외면
“국내 판매실적 없어 시장확대 어려워”
혁신제품 시장창출 지원책 강화 목소리
[123RF]

[헤럴드경제=특별취재팀] 150억원에 달하는 국책기관 지원금을 바탕으로 개발된 토종 의료기기가 상용화 문턱을 넘지 못하며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 업계에서는 어렵게 개발에 성공한 국내 기술제품들이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후속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조달청은 이달 초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에 면역검사시스템을 공급할 낙찰자로 한국애보트를 최종 선정했다. 투찰가는 315억원이다. 면역검사시스템(혈액선별기)은 헌혈을 한 혈액을 다른 사람에게 수혈하기 전 혈액에 HIV, B형 간염, C형 간염, 매독 등과 같은 바이러스가 있는지 선별하는 검사를 말한다. 국내 혈액사업의 ‘큰 손’인 적십자사의 장비 수요가 가장 크다.

한국애보트와 경쟁을 펼친 피씨엘의 제품 ‘하이수(HiSU)’는 성능평가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피씨엘은 이에 대해 입찰 평가 과정이 불공정했다며 기획재정부 국가계약분쟁조정위원회(이하 분조위)에 조정 신청을 냈다. 분조위는 이 건을 자세히 들여다 보겠다며 정식안건으로 수리했다. 심의 결과는 이르면 7월께 나올 예정이다.

하지만 분조위에서 피씨엘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더라도 이번 계약이 뒤집히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분조위 조정은 법적인 강제성을 갖지 못한다. 현재로서는 분조위의 조정안을 적십자사가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피씨엘이 이후 소송을 진행한다고 해도 최종 결과까지는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하이수는 혁신조달 제품으로 선정되며 2008~2022년 4차례에 걸쳐 산업기술진흥원, 보건산업진흥원, 산업기술평가관리원 등 국책기관으로부터 총 150억원을 투자받았다. 여기에 피씨엘의 자체 투자금 100억까지 총 250억원이 투입돼 개발됐다. 거대한 글로벌 의료기기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피씨엘은 국내외에서 혈액선별기 수요처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판매 실적은 지난 2020년 한마음혈액원에 한 대를 납품한 게 전부다. 당시 조달청의 ‘혁신 시제품 시범구매사업’ 대상에 선정됐고, 한마음혈액원이 시범사용을 진행했다. 혈액원은 시범사용 평가에서 하이수에 만점을 줬다.

하지만 국내 혈액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는 적십자사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피씨엘의 혈액선별기는 시장을 창출하기가 어려워진다. 고도의 정밀기술이 탑재되어야 하는 혈액선별기는 구매 과정에서 과거 납품실적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외국에서는 해당 업체의 제품이 자국에서 얼마나 활용되는지 들여다 본다.

김소연 피씨엘 대표는 “해외에서는 ‘하이수 같은 좋은 제품이 왜 너희 나라에서는 쓰이지 않느냐’며 의아해한다. 국내에서 사용되지 못하면 해외 진출도 어렵다. 전 세계 30조원에 이르는 면역검사시스템 시장에 국내 기업이 들어가는 동력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정부 자금이 투입돼 개발된 기술이 글로벌 기업에 밀려 성장하지 못하는 처지인 셈이다. 업계에선 정부가 공급 측면의 개발지원과 함께 시장 창출을 위한 적극적인 후속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재현 파이터치연구원 연구실장이 2019년 쓴 ‘기술혁신 중소기업 공공조달 지원의 거시경제 파급효과’라는 논문에서는 “국내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은 대체로 공급 측면인 연구개발 지원을 중심으로 실시되었으나, 원천기술을 확보하더라도 실제 사업화가 미진하여 그 효과가 높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병건 한국조달연구원 센터장은 “모든 제도가 지원 이후에 결과물이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해선 너무 신경을 안쓰는 것 같다. 국비가 이렇게 들어간 경우에는 수요가 있는 기관이 추가 시범구매를 해주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국내 기술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게 발판을 제공하는 것도 국가의 역할이다. 해외 제품과 국산 제품을 병행 사용하며 국산 제품도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ikson@heraldcorp.com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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