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현충일 찾아온 망종…보릿가루 죽 먹으면 여름내 무탈? [이제야 다시 보는 절기 – 망종]
이날 천둥치면 불길…우박이면 길조
각종 소망·기원 매일 먹고 자란 보리
초여름 굶주림 채워주던 고마운 작물

농민들 고된 땀방울·노고 잊지말라
‘일미칠되’ 외치던 선생님의 참교육

현충일인 6일은 24절기 중 아홉 번째 절기인 망종이다. 속담에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말이 있듯이 망종을 넘기면 보리 수확량이 줄기 때문이다. 망종을 앞둔 5월 25일 경남 함양군 상림공원 경관단지에서 콤바인을 이용해 누렇게 익은 청보리 타작이 한창이다. [함양군 제공]

[헤럴드경제=이운자 기자] 호국보훈의 달 6월이자 현충일인 6일은 24절기 중 아홉 번째 절기인 망종(芒種)이다. 망종은 낟알 겉껍질에 수염이 나 있는 벼, 보리 등 까끄라기 곡식을 의미한다. 재배 농가에서는 보통 이 무렵 누렇게 익은 보리를 베어 내고 막바지 모내기를 한다.

제일 바쁜 시기인 망종 때 보리를 베는 이유는 벼와 보리의 이모작 때문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물을 빼고 그곳에 보리를 심어 겨울을 보낸 후 망종이 오기 전 수확한다. 이는 망종을 넘기면 단단하게 여문 보리 낟알은 그 무게 때문에 바람에 쓰러지는 경우가 잦고 또 시일이 지나도 더 이상 알맹이가 들거나 익지 않기 때문이다. 속담에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말까지 전해 내려오는 걸 보면 후손을 생각하는 조상님들의 지혜가 느껴진다.

반면 풋보리를 처음 먹기 시작하는 날을 의미하는 ‘보리의 서를 먹는다’라는 속담과 ‘보리 그을음’ 세시 풍속에는 배고팠던 시절의 아픈 기억이 함께한다.

농촌에 전해 내려오는 보리 그을음이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아직 여물지 않은 풋보리를 잘라내 모닥불에 구워 먹는 황톳빛 가득한 추억이다. 불에 그을린 풋보리를 양손에 넣고 쓱쓱 비벼 먹으면 이듬해 보리 낟알이 잘 여물고 그해 보리밥도 달게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함께 한다. 이는 보리농사를 많이 짓는 남쪽 지역 민가에서 많이 즐겼다. 일부는 망종 때 보리를 잘라 밤이슬을 맞힌 후 그다음 날 먹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허리 아픈 곳에 약이 되고 한 해를 무탈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원시종교에 바탕을 둔 토테미즘(totemism)적 신앙은 제주도에까지 이어진다. 제주도에서는 풋보리 낟알을 볶아 맷돌로 갈아 보릿가루 죽을 끓여 먹으면 여름 내내 탈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보리의 익는 시기에 따라서도 풍작과 흉작을 점치기도 했다. 이 중 하나가 망종보기로 음력 4월 안에 망종이 들면 빠른 수확과 풍년을, 5월 이후에 들면 낟알 여물기가 멈춰 수확량이 줄어든다고 믿었다. 또한 전라남도, 충청남도, 제주도에서는 이날 하늘에서 천둥이 요란하게 치면 그해 농사가 신통치 않을뿐더러 불길하다고 여겼다. 다만 제주에서는 우박이 내리면 ‘시절이 좋다’며 풍작을 기대했다.

숱한 세월이 지나 이제는 열무김치와 함께 여름철 계절 별미이자 건강식이 된 보리밥.

‘대추 한 알’에도 태풍 몇 개와 벼락 몇 개가 들어 있다는데 그보다 몇십 배는 작을 보리 한 톨에 그리 많은 농민의 기원과 소망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함께 애틋함이 발동하는 건 왜일까.

코흘리개 시절 점심시간 때면 선생님은 ‘일미칠되’ 네 음절을 외치곤 하셨다. 쌀 한 톨에 일곱 되(한 되는 약 1.4~1.6㎏) 농부의 땀과 노고가 스며있다는 의미로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말고 챙겨 먹으라는 당부셨다. 낯설기만 했던 ‘일미칠되’의 속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다. 보릿고개를 한 번쯤은 경험해 보셨을 연륜의 선생님께서는 단 한 톨의 보리밥, 쌀밥의 소중함은 물론이고 낭비를 허락하지 못하셨을 터였다.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농촌에서는 먹을거리가 없어 배를 곯던 보릿고개를 연례행사처럼 치르곤 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먹을 수 있는 나무껍질과 풀뿌리 등을 캐어 죽으로 쑤어 먹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일도 잦았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일상에서 사라진 시기는 1960년대 후반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힘입어 벼 품종 개량과 비료·농약의 공급 확대가 이뤄지면서다. 정부 주도의 식량 증진과 지금은 초등학교로 불리는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점심 급식(우유와 곰보빵)이 이뤄지면서 보릿고개라는 단어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러다 문득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봤던 화제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어린 손자에게 먹을 것이 없었던 보릿고개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던 할아버지. 당시 먹을 쌀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고 설명하자 손자가 말하기를 “그러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대답해 할아버지의 말문을 닫게 했다. 다음날 출근 후 동료들과의 커피타임 중 해당 장면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당시 그 장면에 아무 생각 없이 박장대소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 대답이 전혀 생뚱맞은 것도 아니지 않나 싶다. 모든 물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태어난 세대들에게는 굶주림이란 단어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공감하기 힘든 단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 한 켠에는 하루 한 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현대판 보릿고개’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어려운 이웃을 보듬고 돕는 것이 반드시 사회 고위층이나 부자만이 행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는 얘기다.

yihan@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