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중심 ‘광라장창’, 풍요의 ‘3평’ 모두 포함
국제슬로시티 삼지내 지나 베롱꽃 가로수길
조광조 제자 양산보,자연속 살롱 소쇄원 짓고
김인후,송순,환벽당 주인 김윤제와 나라걱정
양응정,기대승,고경명,정철 충절·낭만 계승
소통 위한 단절의 미학,위민·상생의 철학 담아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전남 담양군 소쇄원은 조선 정원미학의 고갱이 만을 한 눈에 보여주는 아담한 진본이고, 죽녹원은 소쇄원의 미학을 다채롭고 촘촘한 응용 콘텐츠로 확장시킨 74배 짜리 복사본이다.
담양 소쇄원 광풍각에서 주변을 감상하며 편하게 쉬는 국민들. |
죽녹원의 대나무 아래엔 대나무이슬을 먹고 자라는 죽로차 나무들이 군락을 이룬다. |
각각 국가 명승 문화재, 국민 공원인데 온 나라 사람들이 와서 참 잘 노는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곳은 담양의 건강성을 상징한다. 전남은 전국 방역 최우수 광역단체이고 그 중에서도 담양은 감염병 관리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곳이다.
읍내에서 녹죽원, 관방제림, 국수거리를 둘러보고, 남쪽으로 향해 창평 들판을 지날 무렵부터 전국에서 보기 드문 베롱나무(백일홍) 가로수길이 조성돼 있다. 창평현로에서 가사문학로로 갈아타기전 동쪽에 있는 창평면 삼지내 마을은 아시아 첫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삼지내 마을 인근 무월마을 홍주송씨 집성촌은 고풍스런 전각과 여민동락 생활문화가 잘 남아있다. 담양 홍주송씨네가 인근마을 화순적벽을 마주보는 자리에 물염정(국가명승)을 지었다. [남도일보] |
▶소쇄원에 가는길, 광라장창-함창남, 슬로시티-베롱길= 지금의 담양 남부와 광주-화순 북부는 1913년까지 군수의 관아(읍치)가 있던 창평군이었는데, ‘광라장창(光羅長昌:광주·나주·장성·창평)’이라 불리는 남도 4대 도시였다. 풍부한 물산이 있고, 영산강을 통해 많은 물량이 교류되어 풍요로운 곳임을 말해주는 ‘3평’ 도시(창평,남평,함평) 중 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남쪽의 가사문학면 소쇄원을 가기 전에 삼지내마을 둘러보고 바로 옆 창평시장에서 원조국밥 한 그릇 먹어야, 담양의 원조격 고을인 창평의 진면목을 다소간 흡입할 수 있다.
제주도가 밭의 경계선 현무암 밭담이 쌓았다면, 삼지내마을은 야트막하게 일반 돌로 담을 쌓아 마을 골목을 이었다. 담 위로 고개를 내밀어 이웃과 대화할 수 있다. 2007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 도시로 지정된 삼지내 마을은 초입부터 담쟁이넝쿨이 뒤덮은 토석담 골목길이 반기고 고택들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한다. 넝쿨 돌담 외에도 흙 줄무니가 있는 돌담, 각기 다른 모양의 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버틴 비정형 돌담 등이 3.6㎞나 이어져 있다.
삼지내마을 옆 무월마을은 물염정을 화순적벽 앞에 지은 담양 홍주송씨 집성촌으로 조선 남도 양반가의 전통문화와 여민동락 생활문화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담양깨기’는 최소한 1박2일을 요한다. 첫날 드넓고 다채로운 죽녹원을 충분히 즐기고 관방제림 옆 대나무 뗏목을 타고 놀다가 담양 오방길 일부 구간을 산책한 뒤, 국수거리의 약계란물국수와 읍내 맛집거리의 떡갈비, 죽순게장을 음미한다.
환벽당 명승 일대 |
그리고 다음 날 창평시장과 국밥거리, 슬로시티 삼지내마을, 남도선비의병문화를 느낄수 있는 ‘호남의(義)정신관’, 가사문학관, 소쇄원·식영정·환벽당·화순 북부 물염정·적벽 등 명승 밀집지역 까지 즐긴다면 담양깨기의 51%는 만족하리라 싶다.
베롱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소쇄원으로 가는 동안, 동행하던 증암천에 무등산과 성산의 신록이 언듯언듯 비친다.
▶엘리자베스의 아쉬움, 조광조의 소년 제자 양산보= 헤럴드경제와 남도일보 탐방단 취재결과, 소쇄원은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이 1999년 방한때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으나, 갑작스럽게 사정이 여의치 않게 돼 감상하지 못한 곳이다.
소쇄원은 자연 개천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담 아래를 뚫었다. |
숙부 양팽손(1480~1545)의 천거로 조광조(1482~1519)의 제자가 된 양산보(1503~1557)가 손수 소쇄원을 건설하고 이종사촌 형인 면앙정 송순(1493~1582)이 증축을 돕는다. 조광조의 피살로 힘겨워했던 사림이 르네상스를 도모한 곳이다.
사약 받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고 사당을 세운 양팽손 옆에는 열여섯살 된 양산보도 동행했고, 쓰러진 도학을 바로 세우려는 소년 선비의 의지가 소쇄원의 건설로 이어진 것이다.
양산보는 소년급제 직후 스승을 잃고 낙향, ‘소쇄(몸과 마음을 씻음)처사’가 된다. 간신배들에게 놀아난 중종(1488~1544)이 뒤늦게 반성하고 벼슬길로 불렀지만 마다했고, ‘소쇄처사’로서 공부하고,토론하며,후학을 양성한다.
소쇄원 입구 대숲과 정원 계곡이 만나는 곳 |
정원을 보여주기 전에 100여m 대나무숲을 조성한 것은 원주 뮤지엄산 처럼 주인공을 더 감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베일로 가린 효과, ‘소통을 위한 단절’의 뜻도 있지만, ‘소쇄처사의 대나무 같은 절개는 꽤나 두툼하다’는 것을 시위하고 있다.
이곳엔, 호남사림 중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현자이자 양산보의 사돈인 김인후(1510~1560), 담양부사 임억령(1496~1568), 환벽당의 주인이자 송강 정철의 스승인 처남 김윤제(1501~1572), ‘소쇄원 가랑비 속에 매화를 찾아보다’라는 싯귀로 이곳의 이름을 지어준 송순 전라감사 등이 애용했다.
▶굴뚝이 마당 아래 있는 이유= 후학으로는, 호남 선비의병들의 통합스승인 양응정(1519~1981), 삼촌뻘 퇴계(1501~1570)와 편지로 철학토론과 우정을 나눴던 월봉 기대승(1527~1572), 선비 출신 60대 의병대장 고경명(1533~1592), 관동별곡 성산별곡의 송강 정철(1536~1593) 등이 선배들 앞에서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드나들곤 했다.
대봉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녀 |
봉황을 기다리는 대봉대는 대나무와 벽오동의 호위를 받는 초가 정자이다. 벽오동은 봉황이 즐겨 앉는 나무이고, 대나무열매 죽실은 봉황이 먹는 유일한 음식이다. 성군을 즉위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효심의 상징 동백이 심어진 애양단을 지나 외나무 다리를 건너기전 옷매무새와 의관을 정제한다.
그런 연후에 만나는 광풍각과 제월당은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은 마치 비갠 뒤 햇볕이 나며 부는 바람과 같고 맑은 날 떠오르는 달빛과 같다(胸懷灑落如光風霽月)’는 송시에서 따왔다.
광풍각은 손님들이 노는 곳이다. 주인장과 그 동무들을 만날 용무를 가진 선비가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1년 동안 청소 일, 손님 맞는 일을 했다는 전고필 한국테마여행10선 남도맛기행 총괄PM은 “좋은 나라 만들기 방법론을 토론하는 자리, 술 한 잔 하다 시 한 수 읊는 자리, 꽐라 되어 잘 수도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가장 낮은 곳에 굴뚝을 두고 연기가 나오도록 한 것은 정원의 환타지 안개 효과를 노린 작은 기교이자 숨결의 상징이다. 동양에서 산은 우주, 골짜기는 인간사는 곳, 물은 피, 흙은 살, 돌은 뼈, 나무는 털, 안개는 숨결로 비유된다.
제월당 |
▶베롱의 자기관리, 순갱로회의 무욕= 주인장 양씨네와 그 동무들의 영역, 제월당 주변에 베롱나무를 심은 것은 이 나무가 스스로 수피를 벗는 특성, 꽃 하나가 지면 옆가지의 것이 피기를 100일동안 반복하는 특성 때문이다.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하겠다는 사림 선비들의 의지다. 제월당의 철쪽은 조선 땅 대마도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통나무 수로에 구멍을 뚫어 물이 새도록 함으로써 계곡옆 바위에 이끼가 자랄 수 있게 됐다. [남도일보] |
높은 물길에 통나무 수로를 만들어 연못에 보내면서 나무수로에 구멍을 뚫어 물이 새나가도록 한 이유는 계곡 위쪽 마른 바위에 이끼가 나도록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물줄기 사이엔 넓을 광(廣)자 광석(너럭바위)을 두어 자연친화적 정원의 중심에서 바둑을 두도록 했다.
봉황을 기다리는 대봉대 아래 연못(하지)엔 연꽃 대신 수생식물 순채를 심었다. 옛 진나라 선비 장한의 ‘순갱로회’(蓴羹鱸膾: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를 먹으러 귀향한다)의 그 순채를 지칭하는데, 귀향한 양산보 자신도 장한 처럼 어진 임금이 재림하기전까지 출사할 뜻이 전혀 없음을 뜻한다. 지금 순채가 사라졌는데, 전고필 PM이 알바생 시절 순채 살리기를 위해 만든 시도를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소쇄원은 순채 전문가의 조언과 지원을 구하고 있다.
근년들어 소쇄원의 실제모습을 담은 조선의 평면도 ‘창암촌도’가 발견됨에 따라 소쇄원의 완전한 복원 길이 트였다. [남도일보] |
정유재란,일제 등 일본이 두 번이나 불태웠지만 복원해냈고, 최근 일본 황실박물관에서 ‘창암촌도’를 발견함으로써 진본과 더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할 길이 열렸다. [취재도움:한국관광개발연구원,남도종가회,남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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