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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적북적]우리가 몰랐던 조선 남자의 실체
조선 남자들은 살림꾼, 미덕으로 여겨
요리·장보기는 물론 농사·양봉 부업까지
퇴계 ‘살림의 달인’,연암 자식 반찬 수발
미암 ‘쇄미록’, 가사문제로 부부싸움 기록

조선 중기까지 성역할 구분없이 참여
성리학 내외구분으로 男 살림 등한시
일제강점기, 산업화 통해 역할 굳어져
“남자도 당연히 살림의 한 부분을 맡고 살림을 잘하면 그것이 미덕이 되던 풍속이 임병양란 이후 어느새 바뀌고 말았다. 남자는 입신출세를 오로지하며 학문에 전념하고 안팎의 모든 살림은 여자의 몫이 된 이 풍조가 지금 현대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에서). 사진은 대한풍경

“1596년 10월4일, 아침에 아내가 나보고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한참 동안 둘이 입씨름을 벌였다. 아! 한탄스럽다.”

조선 중기 양반 오희문(1539~1613)이 쓴 일기 ‘쇄미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아내는 살림에 무심한 남편이 원망스럽고, 남편은 나름 열심인 자신을 몰라주는 아내가 무척 서운하다.

미암 오희문은 10년 넘게 일기를 쓸 정도로 집안일에 충실했지만 기준에 못미친듯 하다. 조선시대 남자에게 살림은 당연한 것이었다. 허균은 문집 ‘성소부부고’에서, “미암이 의관과 버선이 때묻고 해져도 부인이 새것으로 바꿔 주지 않으면 꾸밀 줄을 몰랐고, 방은 책상 외에는 먼지와 때가 끼어 더러워도 쓸고 닦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창권 교수가 쓴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돌베개)을 보면, 조선 남자는 살림꾼이었다. 적어도 조선 중기 때까지는 그랬다. 저자가 실생활의 이모저모를 기록한 문집과 일기를 중심으로 살핀 조선 남자는 ‘남자가 살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종래 인식과는 딴판이다.

조선시대 양반의 살림은 오늘날 50~100명 직원을 둔 중소기업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신발, 옷, 쌀, 술 등 의식주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집안에서 생산했고, 자녀 교육, 질병 치료, 종교 활동도 집안에서 이뤄진 작은 사회였다.

관직에 나간 양반은 녹봉을 받지만 대가족을 부양할 정도에는 크게 못미쳤다. 이들 대부분은 집안 소유 농장에서 농사를 지어 가족을 부양했다. 조선시대 관료가 걸핏하면 사직서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간 데는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농사만으로도 부족해 양반 남자는 양계나 양봉 등 다양한 부업으로 집안 살림에 보탰다. 오희문 역시 양계와 양봉을 한 기록이 있다.

집안 살림은 크게 안살림과 바깥살림으로 나뉘는데, 남자들은 각종 생계활동, 재산 증식, 노비 관리 등 바깥살림 외에 안살림에도 참여했다. 살림참여에 애초 남녀의 경계가 없었다. 특히 주식과 찬거리 등 장보기는 남자가 주로 맡았다. 남자가 요리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효’ 문화가 있다. 실학자 서유구는 1807년 경기도 연천에 은거할 때 농사를 지으면서 어머니께 아침 저녁 진지를 올렸으며, 서유구의 조부 서명응도 직접 부엌에 들어가 요리를 해 어머니를 봉양했다.

궁중 요리사 역시 우리가 알고 있듯이 궁녀가 아니라 실제로는 사옹원 소속의 숙수라는 남자 요리사가 모두 전담했다. 궁중에 소용되는 음식을 주관하는 부서인 사옹원에는 300여명이 근무했다. 궁중 뿐 아니라 각 관아의 음식 담당자도 주로 칼자라는 남자 요리사가 맡았다. 이런 조선시대 전문요리사의 존재는 1720년께 편찬된 이시필의 ‘소문사설’에 기록돼 있다.

사실상 살림을 도맡았던 실학자 박지원은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벼슬에 나간 지 반년도 안돼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홀로 자식 뒷바라지를 했는데, 한양의 자식들에게 반찬거리를 만들어 보내 주곤 했다.

1796년 안의 현감 시절,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고추장과 곶감,장볶이 등의 음식을 보내며 밥 먹을 때마다 밑반찬으로 먹으라고 권하고 있다. 특히 보낸 쇠고기 장볶이의 맛이 좋은지 나쁜지 왜 말이 없냐며, 무심하다고 서운해하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 퇴계 역시 ‘살림의 달인’’이었다. 퇴계는 지적 장애를 가진 부인을 대신해서 음식과 의복 같은 안살림, 농사와 반찬거리 마련, 노비 관리, 재산 증식, 세금 납부 같은 바깥살림을 도맡았다.

의복짓기는 여자만의 일이었는데, 누에를 쳐서 명주를 생산하는 양잠만큼은 여자가 전담하려 했다. 양잠은 한철 집중해 일하면 목돈을 쥘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오희문은 5월이 되자 안주인이 과도하게 누에를 쳐서 다른 농사일에 지장을 준다며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자는 비교적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참여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 성리학과 내외법의 강화로 여자의 사회활동이 금기시됐다. 그러나 이즈음 여자의 사회활동을 지원하는 외조하는 남자들이 등장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여자의 문집 중 현존하는 것은 총 32종으로, 대부분 남편이나 아들, 사위, 형제 등 남자들이 편찬했다. 그 첫 사례는 유희춘이 편찬한 부인 송덕봉의 시문집 ‘덕봉집’으로, 유희춘이 부인에게서 받은 편지와 시, 기타 작품을 잘 보관해 책으로 만들었다.

남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리학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고 본격 연구한 여자도 등장한다. 영·정조대의 임윤지당은 성리학 논설인 ‘국가복례위인설’을 통해 여자도 학문과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윤지당의 문집은 윤지당 사후 막내동생에 의해 간행됐다.

평소 금슬 좋은 부부였던 서유본과 이빙허각은 학문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평소 틈나는 대로 함께 앉아 공부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서유본의 집안이 옥사로 몰락하자 빙허각은 팔을 걷어붙이고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저자는 한국은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란 고정관념과 달리 조선 중기까지는 집안에서 남녀 간 역할 구분은 없었으며, 남자가 오히려 여자보다 훨씬 많은 살림을 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성역할 구분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시대 본격적으로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현재까지, 여전히 집안일과 육아를 여성의 몫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이어져 ‘82년생 김지영’과 인구절벽을 낳았다는 저자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다.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정창권 지음/돌베개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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