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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하고 낯선 세계로의 초대장 ‘비틀쥬스’ [리뷰]
팀 버튼 영화 원작ㆍ250억원 대작
진정한 ‘쇼타임’ 증명한 한국 초연
[CJ ENM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거룩하고 엄숙한 장례식 풍경이 150분의 실마리라고 생각하면 오산. 팀 버튼의 기괴한 판타지는 한국 무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불이 켜지면 진짜 ‘쇼 타임(SHOW TIME)’이 시작된다. 주의사항은 두 가지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질주가 시작되니 ‘정신줄’을 꽉 붙들 것, 나도 모르게 ‘비틀쥬스’를 세 번 부를지도 모르니 가급적 ‘입을 다물 것’. ‘저 세상법 제4조’, ‘산 자가 비틀쥬스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산 사람도 그를 볼 수 있다’. 저 세계 앞에선 ‘충동’과 ‘모험’은 금물이다. 평탄했던 삶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일.

뮤지컬 계에 따르면 티켓 예매를 진행하고도, ‘기술적 문제’를 이유로 두 번이나 개막을 연기한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초 6월 19일 개막하기로 했던 ‘비틀쥬스’는 7월 6일이 돼서야 막을 올렸다. 우려도 적지 않았다. 제작비 250억 원이 투입된 브로드웨이 대작이 전 세계 최초로 라이선스 무대를 선보이는 한국에서 제대로 출발선을 끊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개막이 늦춰진 만큼 확보된 3주에 가까운 연습기간 덕에 주조연을 비롯해 앙상블 배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쿵짝’이 잘 맞았다. 호흡은 배우들만 완벽했던 것이 아니다. 비틀쥬스의 손짓에 맞춰 터지는 불꽃, 음악과 맞게 쏘는 레이저,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 등 ‘비틀쥬스’를 만드는 모든 스태프가 버튼 하나로 움직이는 것처럼 오차 없이 완벽했다. 거기에 관객을 놀라게 하는 초대형 비틀쥬스, 모래벌레 등 거대한 조형물까지 적절한 타이밍에 실수 없이 등장했다 미련 없이 퇴장한다. 이것이 개막 연기의 이유였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큼 ‘비틀쥬스’엔 어렵고 힘든 장치와 특수효과로 수두룩했다.

[CJ ENM 제공]

2019년 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인 ‘비틀쥬스’는 1988년 제작된 팀 버튼 감독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무려 98억살. “VIP석과 R석 사이에 낀 시야 제한석”처럼 이승과 저승 사이의 ‘낀 존재’로 살아온 외로운 유령 비틀쥬스(유준상, 정성화)와 신입 유령 바바라(김지우, 유리아)와 아담(이율, 이창용) 부부, ‘중2병’이 아닐까 싶게 삐딱한 ‘유령을 보는 소녀’ 리디아(홍나현, 장민제)의 ‘우당탕탕’ 이승 스토리다.

‘비틀쥬스’의 무대는 관객에게 보내는 ‘이상하고 낯선’ 세계로의 초대장과 같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깊고 넓은 무대는 팀 버튼의 판타지를 구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전막을 거치는 동안 세트는 크게 네 번의 옷을 갈아입는다. 배경이 되는 곳은 리디아의 집. 하지만 집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한다. 온기가 넘치는 빅토리아 양식의 이층집에서 벌레가 들끓는 괴상한 공간으로 변하고, 붉고 둥근 달을 향해 날아오르고 싶은 목조 주택의 옥상으로 장소를 옮기기도 한다. 팝업북 같은 세계가 무대로 옮겨왔다. 거실에서 창고로, 창고에서 옥상으로, 다시 침실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쉴 새 없이 오가는 장면 전환을 보고 있자면 마법에 홀린 듯한 기분마저 든다.

뮤지컬은 등장인물들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98억년 동안 ‘소통’하지 못해 너무도 외롭고, 외로움의 크기만큼 말수가 늘어버린 유령 비틀쥬스와 죽은 엄마를 뒤로 한 채 희희낙락하는 아빠와 가정교사가 못마땅한 사춘기 소녀 리디아, 난데없이 죽음을 만나 졸지에 유령이 된 바바라와 아담 부부다. ‘비틀쥬스’의 재미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티키타카’에서 나온다. 미국식 블랙코미디는 한국 관객의 정서에 맞게 완벽히 옮겼다. 2021년의 대한민국을 100% 반영했다. ‘전세금 빼서 코인 투자’, ‘코로나19 검사 그만하고 싶어’, ‘알고리즘의 지옥’ 등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 위트 있는 대사와 풍자는 몰입도를 높였다. 작품의 번역을 맡은 김수빈 번역가는 공연이 임박한 시점까지도 가장 적확한 표현을 찾아 다듬기를 반복했다.

[CJ ENM 제공]

볼거리와 위트를 쏟아부은 1막이 지나가면 2막은 드라마에 초점을 둔다. 리디아 부녀의 화해와 성장이 주요 줄기다. 드라마에 중점을 두면서도 스토리의 밀도가 약한 것은 흠이다. 리디아의 급작스런 변화는 유령의 존재처럼 난데없이 느껴진다. 하지만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지는 쾌감은 2막의 실망감도 지워줄 만큼 크다.

‘비틀쥬스’는 그토록 인간의 삶을 살아보고자 했던 유령조차 ‘고단하다’고 말하는 우리의 일상과 ‘일상의 끝’인 죽음을 그린다. 불현듯 튀어오르는 단상들은 화려한 볼거리만큼 매력적이다. 살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 찬 ‘저승 신입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강펀치를 맞는 기분이다. 사람은 결국 살아서도 죽어서도 외롭다는 이야기를 비틀쥬스의 끝도 없는 징징거림과 감정변화로 표현한 것도 재치있다. “와, 사는게 이렇게 힘들어? 너희들 참 대단하다”는 비틀쥬스의 선언같은 한 마디는 꽤 위안이 된다. 올 여름 한 번은 가봐야 할 ‘기묘한 세계’가 틀림없다. 공연은 8월 8일까지.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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