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진주성전투 논개열사, 초대 의병청장의 부인...유럽보다 먼저 사립대학 설립한 최충의 후예 [종가의 재발견]
화순 해주최씨 승지공파 종가
화순 해주최씨 의병청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호남에서 의병 궐기가 많았던 것은 농민,양반 등 다양한 계층을 조직적으로 편성하고 전략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헤드쿼터 ‘의병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순읍 상삼마을의 의병청은 해주최씨 집안과 최경회 장군이 이끌었다. 해주최씨 승지공파 고사정종가에는 지금도 커다란 의병청 표지석이 있다. 주논개 열사가 그의 부인이다.

논개 열사는 살림살이는 어려웠지만 주희의 후예인 신안 주씨 양반가 여식으로, 최경회 장군이 첫 부인과 사별할 때, 집안 일을 도와주던 논개의 품격과 됨됨이를 알아본 부인의 유언에 따라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몇몇 야화(野話)에 기생 표기는 명백한 잘못이다.

신라 개국의 주역 중 한 집안으로 알려진 최씨가 해주를 본관으로 둔 것은 고려초기 해주 토호였던 최온(?~?)으로부터 비롯됐고, 그의 아들이 바로 ‘해동공자’ 최충(984~1068)이다. 총리격인 문하시중에 오르고 국내 최초의 사립대 ‘9제학당’을 설립했다.

최온의 15세손 진사 최윤범(?~?)이 영암에서 화순에 입향해 승지공파 종가를 열었다. 최윤범의 손자 최경운(?~1596), 최경장(1529~1601), 최경회(1532~1593) 삼형제가 의병청을 세운 주역들이다. 이들 3형제는 학포 양팽손의 아들 양응정(1519~1581)과 외종형제 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형제는 화순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병사·전마·군량을 모았다. 최경운의 아들 최홍재(1560~1614)는 승리한 금산전투에 고경명 의병부대 지원군으로 합류했다. 비슷한 시기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최경회는 전북 장수로 출전해 왜군을 격퇴시키고, 무주전투에서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부하 적장을 활로 쏜뒤 ‘언월도’를 전리품으로 노획했다.

최경회는 진주성으로 이동해 9간 사투를 벌이다 병기과 군량이 다하자 촉석루 남강에 투신했다. 주논개는 적장을 꾀어 가락지를 10손가락에 낀뒤 적장을 붙잡아 함께 죽고 왜군의 사기를 급전직하시켰다.

형인 최경장이 의병청 대장직을 이었다. 선조는 권율의 천거로 최경장을 ‘(승계) 의병대장(繼義兵大將)’으로 공식 임명했다. 삼형제의 장남 최경운은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 500여명과 함께 오성산성을 지키다 순국했다.

함영훈 기자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