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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펌 인사이드] ‘약자의 대변인’ 조영래 변호사 타계 30년…변호사 공익활동 주춧돌
부천서 성고문 사건으로 이름 알려…‘전태일 평전’ 집필
상봉동 진폐증 사건·망원동 수재 사건 통해 사회권 의식 고취
김앤장 등 국내 주요 로펌도 별도 위원회·법인 통해 공익활동 나서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변호사회 회관에 서 있는 조영래 변호사 흉상. 서울변회가 김한규 회장 재직시절인 2015년 조영래 변호사 타계 25주기를 맞아 세웠다. 이듬해 광화문에 재개관한 서울변회 회관은 ‘조영래 홀’로 작명됐다.

[헤럴드경제=좌영길 기자] ‘용기가 없는 사법부, 스스로의 사명을 저버린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말하거니와 이 재정신청 기각결정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사법부의 독립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고(故) 조영래(사법연수원 12기) 변호사가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경찰관들에 대한 무혐의 처분에 불복해 재정신청을 냈지만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남긴 글이다. 대중과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삶을 살았던 조 변호사는 우리나라 법률가 공익활동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박종철 치사사건과 함께 1987년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조 변호사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도중 쓴 ‘전태일 평전’은 대중에 ‘청년 전태일’이 드러나는 계기였다.

‘망원동 수재사건’ 등 변호사 공익소송 시초…빈곤계층 이익 대변

조 변호사는 단순히 한쪽 진영의 대변자가 아니라, 능력있는 법률가로 법조계 전반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활동 영역도 시국사건 변론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가 법률가로서 제기한 다양한 사회 문제는 법조인은 물론 사회운동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 환경권이나 집단 소송 개념이 희박하던 1980년대에 ‘상봉동 진폐증 사건’과 ‘망원동 수재(水災) 사건’에서 국가 배상을 받아내 변호사의 공익 활동 범위를 넓혔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염형국 변호사의 말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크게 두 가지로 소개할 수 있다. 전태일이 1972년 분신하면서 주장한 노동권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정권에서 노동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했고, 법에서 정한 근로기준도 지켜지지 않았던 시기다. 조 변호사가 은둔하면서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면서 우리 사회의 노동권의 중요성을 사회적으로 이슈화했다. ‘망원동 수재 사건’을 통해서는 공익사건 시초를 열었다. 그동안 소외됐던 빈곤계층의 이익을 대변해 공익 소송으로 분출함으로써 법적인 구제 절차를 열어준 점은 큰 업적이다.”

망원동 수재사건은 1984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 유수지 수문이 무너져 침수 피해를 입은 수재민 5800여 가구를 위해 무보수로 국가를 상대로 단체소송을 냈던 사안이다. 1심 민사소송에서 승소한 뒤 조 변호사는 1987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잘못은 덮어두고 천재(天災)로만 돌리며 책임 회피를 일삼는 공권력의 타성에 제동을 걸고, 시민의 침해된 권리를 구제하기 위해 소송을 맡았다”고 밝혔다. 1988년 ‘상봉동 진폐증 사건’은 서울 중랑구 연탄공장 인근 공장에서 나오는 석탄 분진으로 진폐증에 걸린 시민을 위해 강원산업을 상대로 소송을 냈던 사건이다. 조 변호사는 당시 일반인에 생소하던 ‘환경권’을 토대로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전태일 평전 저술, 부천서 성고문 사건 맡아… 폐암으로 44세 별세

경기고-서울대 법대 출신의 조 변호사는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생 신분으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1년 6월의 실형을 살았다. 출소 후에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여간 수배를 피하며 은둔생활을 했다. 사법연수원을 10년 터울 후배들과 함께 수료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조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출고한 것도 수배 중이었을 때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었다. 정권의 노동탄압이 심각했던 상황에서 ‘조영래’라는 저자명은 표기되지 않았다. 이후 1991년 개정판이 나올 때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조 변호사는 1980년 수배 해제 이후 복권, 2년 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이 ‘조영래’라는 이름을 알기 시작한 것은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통해서다. 조 변호사는 피해자 권인숙씨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5공화국의 참담했던 인권 상황을 세상에 드러냈다.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성고문을 당한 한 여성의 인권은 검찰과 법원도 외면했지만, 조 변호사의 집념으로 결국 가해자인 부천서 경장 문귀동은 87년 6월 항쟁 이후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돼 징역 5년의 실형을 살았다.

조 변호사는 1988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창설에도 참여했다. 1990년 12월 12일 끝내 군사정권의 끝을 목도하지 못하고 44세에 폐암으로 타계했다. 조 변호사가 생전 담배를 즐겨 주위에서 건강을 염려했다고 한다.

김앤장 설립자도 조영래 후원 자처… 국내 주요 로펌들 별도 기구 만들어 공익활동

현재 우리나라 주요 로펌들도 공익 전문 위원회나 별도의 법인을 만들어 사회공헌 사업을 하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김앤장법률사무소의 설립자인 김영무 박사는 사실 조 변호사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사법연수원에서 퇴소당한 조 변호사를 비공식 사무원으로 썼고, 조 변호사의 모친 생활비를 대주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앤장은 헌법재판관 출신의 목영준 변호사를 영입하고 사회공헌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은 2009년 국내 로펌 중에서 처음으로 공익전담 법인인 ‘동천’을 설립했다. 동천이 직접 이주노동자나 경제적 약자를 대리하기도 했지만, 이곳을 통해 공익활동 경험을 쌓은 변호사들이 업계에 진출해 또다른 사업을 펼치는 ‘프로 보노(변호사 공익활동)’ 인재 산실 역할도 하고 있다. 법무법인 광장도 별도의 공익활동위원회를 운영 중이고, 세종은 2014년 설립한 사단법인 ‘나눔과 이음’을 통해 공익활동을 한다. 법무법인 율촌이 설립한 공익사단법인 ‘온율’은 고령이나 장애로 법적 대리인이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성년후견제도에 전문성을 갖췄다. 법무법인 화우 역시 화우공익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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