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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비가 의병 되고 곳간 열고, 남도 종가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쥬’
구국, 사상, 인문학, 멋, 맛, 흥의 중심역할
양성평등 족보의 효시, 여류문학가 배출도
명량대첩 수훈갑, 한국철학 주류사항 탄생
이화에 월백하고,까마귀 검다하고 충신 배출
노론의 수백년 일당독재 속 제대로 조명 안돼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유네스코 등재 충분”
영광 군남면 연안김씨 직강공파 종가 매간당 고택. 국내 최대 규모인 125칸의 대저택이다. 신라 김알지·내물왕의 후손으로 3효자를 배출했다. [연합]

[헤럴드경제=함영훈 선임기자] 고려 태조 왕건의 오른팔 류차달은 황해도 신천을 본관(문화류씨)으로 삼았는데, 후손인 조선 영조때 문·무관 유이주는 대구에서 살다가 전남 구례군 오미리 지리산 자락에 이르러 무릎을 탁 친다.

당시 풍수에 의하면, 금가락지, 금거북이, 다섯보배들이 모인 명당이라는 것이다. 무려 7년간 조선의 건축미학을 총동원해 운조루 등을 지은 뒤 새로운 세거지로 삼는다.

운조루
운조루 곳간 뒤주에는 ‘누구든 열어 가져갈수 있다’는 뜻의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적혀있다.

무관으로 출발해 지금의 순천일대인 낙안군수로서 행정 리더도 했던 그는 건축에도 능했다. 정조가 등극한 후 수원화성 축성하는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전해진다.

▶나눔의 운조루= 대문 윗쪽에 호랑이 뼈가 걸려있는 고택 입구를 지나 곳간에 가면 뒤주에는 ‘누구든 열어 가져갈수 있다’는 뜻의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적혀있다. 문화류씨 종가, 나눔의 상징이다.

호랑이를 채찍으로 다스릴 정도로 용맹하고, 행정과 건축에도 능한 팔방미인이 겸손하고 나누기 까지 했으니,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다 나눠줘서 주인 가솔도 끼니를 걱정할 때면, 주민들과 함께 소나무껍질 끓인 죽 ‘송쿠죽’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매간당

김알지·내물왕의 후손인 황해도 연안김씨 직강공파는 전남 영광에서 터 잡은 후 김전-김재명-김함 세 효자을 낳은 효자가문인데, 종가건물 매간당은 조선후기 건축의 백미로 평가된다.

제주에서 이주한 전남 담양의 제주양씨 가문 창암종가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시 한국 오면 꼭 가보고 싶어했던 우리나라 3대 정원 소쇄원을 가꾸었다. 물자가 풍요로운 담양 창평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살던 장흥고씨 양반들은 임진왜란 고경명, 일제강점기 고광순으로 어어가며 재산은 물론 자신들의 몸까지 나라에 바쳤다. 웬만한 남도 종가의 주인들은 누란의 위기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에 다시오면 꼭 가보겠다고 했던 담양 제주양씨의 소쇄원
담양에 있는 장흥고씨 종택. 고경명 의병장의 가문이다.
포충사가 보관중인 고경명 문적(교지). 선비가 칼을 잡고 싸운 것이다.

▶“종가 고택은 국민의 것, 인류의 것”=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의 후손인 윤형식 해남윤씨 종가회장 겸 전남종가회장은 근년들어 헤럴드경제 취재진 등과 만나, 녹우당과 딸린 유산을 공익법인화하면서 세습 및 사유화를 스스로 막았음을 전했다. 이미 국민의 것,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사에선 전쟁, 흉년때 귀족이 솔선수범하는데, 우리에겐 이런 본보기가 없는 것일까. 국사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조선-한국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는 지역사회 리더들이 많았다. 남도 종가들이 대표적이다. 수백년 노론의 탐욕적 일당독재와 집권세력의 호남 홀대가 나란히 이어졌기에, 조선 초·중기까지 찬란했던 남도 양반가 리더들의 모습이 오늘날 까지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을 뿐이다.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다)’는 말이 1000년 이상 유효하게 이어진 이유이다. 고경명 처럼, 윤형식 처럼, 선대이든, 후손이든 지역 리더들이 구국과 나눔에 앞장섰다.

▶인구 7%, 고택 26%…탈호남 전국적 성격의 남도고택문화= 우리나라 인구의 7%, 면적의 12%가량을 점하는 전남·광주지역이, 종가 고택 수 면에서는 전국의 26%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이 많지 않다. 당대엔 서울이 가장 많았겠지만, 지금은 문화재 보존 등이 잘 이뤄진 남도의 고택 수가 전국 최다 수준이다.

전남종가회를 이끌고 있는 해남윤씨 녹우당 [연합]
해남윤씨 종가음식
다방면에서 천재적 재능을 보인 해남윤씨 종가의 윤두서

본관을 기준으로 2/3가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가문들이라, 남도 100여 종가고택의 주인들이 일궈내고 발전시킨 전통문화의 성격은 가히 전국적이다. 호남 30%, 영남 30%, 경기 12%, 북한 10%, 충청 10% 정도이며, 나머지는 강원 제주 등이다. 남도종가에서 민족화합의 시사점도 엿본다.

남도 종가는 ▷국방 ▷사상(철학-인문학) ▷과학 ▷멋(건축,조경) ▷맛(종가 및 대동 공동체 음식문화) ▷흥(예술)의 허브였다. 지금 남도의 민관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중이다.

헤럴드경제는 앞으로 전남종가회,전남도,광주광역시,남도일보 등과 함께 ‘남도종가’의 진면목을 국민과 공유하는 기획보도를 이어간다.

▶종가음식, 양성평등, 충절= 의기,용맹,나눔을 겸비한 고산 윤선도, ‘다빈치’ 처럼 사상·문학·지리학·미술 등 다방면의 재능을 발휘한, 자화상이 국보인 윤두서의 해남윤씨 종가가 우리 역사에 미친 다방면의 영향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이 집은 웰빙 종가음식으로도 유명하다. 닭강정 만큼 맛있는 보약 간식 ‘비자강정’, 생선을 갈아 뭉친뒤 쪄낸 ‘어(魚)만두’, 연화문(蓮花紋) 슈크림빵 같은 ‘각색다식’, 곶감보다 더 맛있는 ‘감 단자’와 ‘육만두’를 만들고 있으며, 찾아오는 손님에게 다과로 내어준다.

같은 가문의 이웃동네 항촌파 종가는 조선 초기부터 아들,딸 구분 않고 족보에 가계(家系)를 세세히 기록해 남녀평등 족보의 효시로 평가된다.

보성의 성주이씨는 국어책에 많이 나온다. 고려말 이조년은 ‘이화에 월백하고..다정도 병인 양 하여..’ 다정가를 통해 충언을 듣지 않는 임금을 걱정했고, 조선초 이직은 ‘까마귀 검다하고..속 조차 검을소냐..’라는 오로시로 정치인들의 표리부동을 힐책했다. 이조년의 친형은 중국에서 가문을 열어 명나라 대조선지원군 대장 이여송을 후손으로 두었다.

최경회 의병장-주논개 열사 부부를 낳은 해주최씨의 의병청 표석 [남도일보 제공]

▶양반이 선봉에 선 ‘노블레스 오블리쥬 ’호국정신= 호국과 충절의 가문으로는 ▷조선이 개발해 명나라가 겁을 냈던 다연발 미사일 ‘대(大)신기전’을 개발한 영암 반남박씨 부솔공파 ▷명량해전때 충무공의 오른팔이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청주김씨 강진파 ▷외교 지략가 서희의 후손인 무안 이천서씨 절효공파 ▷조선 태조 이성계의 형 이원계가 고려말 왜구를 토벌하고 세거했던 영광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의병대장 고경명의 사위집안으로 수양대군 쿠데타에 저항한 순천 옥천조(趙)씨 절민공파 ▷최경회 장군이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청을 세우고 전투에서 승리해 토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문장을 빼앗고 둘째부인 논개는 적장을 휘감아 진주 남강에 뛰어든 해주최씨 승지공파 등이 있다. 주씨 성을 가진 논개는 관기가 아니다.

공동체 나눔, 양성평등의 문화를 가꾼 남도종가로는 ▷평민과 더불어 사는 대동계를 만들어 지방자치의 모델을 실천한 영암 창녕조(曺)씨 태호공파 ▷여민동락한 영암 남평문씨 순평부원군파(애송당 ) ▷미암 유희춘의 부인이자 여류문장가 송덕봉(1521~1578)를 키워낸 담양 선산류(柳)씨 문절공파 ▷아전과 평민의 자제 까지 교육했던 다산 정약용의 수제자 이시헌의 의리와 나눔이 돋보이는 원주이씨 병사공파 강진 백운동 원림 등을 들수 있다.

강진에 있는 원주이씨 병사공파 종가 백운동 원림의 후손 이현정 박사가 야생차를 채취하고 있다. 정약용-이시헌 사제간 의리는 차(茶)를 매개로 단단해졌다.

▶기대승, 안향, 백광홍의 후예들= 사상과 인문학 분야에서는 ▷호남 학문의 틀을 세운 안향의 후예 보성 죽산안씨 문강공파 은봉종가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영광 진주강(姜)씨 수은공파의 내산서원 ▷후배인 송강 정철이 벤치마킹한 ‘관서별곡’의 저자이자 국내 기행 가사의 효시로 불리는 백광홍의 장흥 수원백씨 기봉종가 ▷단군제국의 일부를 요하일대에서 계승한 기자조선의 후손이자, 조선 양대 사상가 기대승을 낳고 을사오적 암살을 기도했던 가문, 장성 행주기씨가 남도에 오래 터잡았다.

최근 남도종가를 둘러본 이배용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은 “한옥, 한식, 한복 등 한국적인 의식주 생활문화가 모두 포함돼 있는 종가문화는 세계에 내놓아도 자랑스런 유산”이라면서 서원에 이어 남도 종가의 유네스코 등재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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