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개혁 군주’ 정조의 법치, “백성 동요치 않게”
‘18세기 후반 조선’의 맥락에서 재해석
문·무··예·법 나눠 총체적으로 통합
정치 궁극의 목표는 ‘성리학적 가치실현’
문학,통치 요소로…시문 통해 의도 전달
억울함 최소화…밤샘 ‘살옥심리’ 몰두도
“정조는 후손에게 길이 복되는 정치를 꿈꾸었다. 단기적 효과를 내는 시책보다 ‘나라가 영구히 유지될 수 있는 방도’를 찾고자 했다. 국방과 민생, 외교 등 시급한 현안들을 처리하고 경제적 풍요, 정치적 안정, 사회적 화합을 이끌어낼 정책과 제도도 마련했다.”(‘정조학 총서’에서). 사진은 정조대왕 능행차 축제

조선의 왕, 정조는 흔히 계몽군주이자 성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세기 후반을 ‘조선의 르네상스’로 보는 시각에서 정조는 구습을 개혁, 근대 국가를 준비한 계몽군주로 비쳐진다. 이는 오늘날의 시각일 뿐, 정조 본인은 당시를 ‘폐단으로 곪아 터지기 직전’의 상태로 봤다. 정조는 이를 고쳐 성리학적 가치가 실현되는 나라를 완성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개혁 군주였다.

‘정조학 총서’(전4권)는 정조를 현재의 눈으로 해석하는 게 아닌 정조의 말과 행동, 삶과 글을 18세기 후반 조선이라는 당대의 맥락에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특히 정조가 추구한 성리학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문·무·예·법, 네 분야로 나눠 정조와 그 시대를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통찰했다.

이 총서는 조선시대사 연구자 4인(백승호 ‘정조의 문치, 허태구 ‘정조의 무치’, 김지영 ‘정조의 예치“,김호 ‘정조의 법치’)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총서 지원 아래 6년 동안 면밀히 사료를 들여다보고 연구한 성과물이다.

백승호 한남대(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는 글쓰기, 문학을 통해 통치한 정조에 주목했다. 제왕문학의 대표적 사례로 여겨진다. 정조는 문체가 세상을 어지럽히기도 바르게 나아가도록 만든다고 보고, 이를 통해 자신의 통치 이상을 구현하려 했다.

즉위 초기, 정치적 기반이 공고하지 못했던 정조는 학문과 글쓰기를 통해 사대부 관료들의 지지와 동의를 구해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신하들과 시(詩)를 주고받는, 시 수창이 대표적이다. 정조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의중을 넌지시 알리고 신하들의 동의를 구했다. 태평성대를 자찬하는 문학작품을 지어 성군의 정당성을 보이려고도 했다.

1791년 음력3월17일, 정조가 세심대에 올라 꽃구경을 하며 지은 시를 신하들에게 보이고 화답하게 하면서 차가 끓을 때까지 다 짓기로 시령을 내린 얘기가 ‘홍재전서’에 전한다.

정조는 ‘한가롭고 꽃다운 봄날에/세심대에서 속세의 소란함을 씻노라./두 산이 참으로 문 하나로 통하니/온 숲이 또한 같은 동산이구나./아름다운 하늘빛은 고요하고/우뚝하게 지세는 높구나./자리에 백발노인이 많은데/내년에도 오늘 같은 잔치를 벌이세.’라고 지었다.

정조는 이날 그저 봄꽃을 즐기려 간 게 아니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표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갔다.세심대는 본래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경모궁터로 정해졌다가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곳이다. 정조는 시구 하나하나에 정치적 함의를 넣었다.

그 자신 그런 목적성을 갖고 시를 지었기에, 신하들이 지은 시도 정치적 의미를 묻곤 했다. 가령 1798년 3월17일에 보낸 어찰에서 정조는 심환지가 지은 한시에 있는 ‘반나마 비었다’라는 구절과 관련, 누군가가 벽파에서 이탈한 건 아닌지 물었다.

시문을 통해 소통하려는 정조는 시 수창 범위도 자신의 측근인 동덕회 구성원에서 규장각 각신, 각신의 자제로까지 넓혀갔다. 정조는 군신의 관계를 ‘일가’로 묘사,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는가하면 원자였던 순조가 참석한 시회에선 신하들 보기를 일가처럼 본다고 하며 대를 이은 충성을 부탁하기도 했다.

정조는 신하와 시를 주고 받을 때, 본인의 정치적 의도가 제대로 읽혔는지 주의를 기울이며, 뜻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았을 경우, 이만수나 이복원 같은 신하들에게 그 뜻을 부연할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저자는 정조는 문학을 통해 신하들과 소통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동조하는 근왕 세력을 육성하고 자신의 치세가 태평성대이며, 많은 이들이 국왕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권위를 과시하는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한다.

‘정조의 법치’를 살핀 김호 경인대(사회학과) 교수는 정조 통치론의 요체로 ‘백성을 요동치게 하지 않는다(不擾民)’ 란 세 글자를 꼽았다. 법과 정령(政令)으로 백성들을 동요시켜선 안된다는 게 정조의 법치였다.

정조가 맞닥뜨린 현실은 온갖 욕망과 악행으로 유교사회가 흔들리는 말세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성리학의 이상을 추구한 정조는 백성들의 ‘강제없는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교화를 제일의 통치수단’으로 택했다.

왕 위에 오른 정조는 ‘흠휼전칙’의 반포를 시작으로 형정(刑政)제도의 개선에 나섰다. 영조의 교화론을 계승, 25년 재위 기간 내내 ‘흠휼’, 즉 형벌은 가급적 최소화하되, 응징해야 할 자는 엄격하게 처벌했다.

이를 위해 정조는 밤을 새워가며 살옥사건의 판결문을 직접 살폈다. 해당 범죄의 처벌에 적확한 율문을 인용하고, 사건의 맥락과 인간다움의 도리를 살폈다. 법의 정의로움은 단순히 ‘보복’의 기능에 있지 않았다. 세상물정에 부합하는 최선의 판결을 얻음으로써 당대의 인정세태에 호응하고자 했다. 그런 판결은 공평한 법감정으로 수용되고 원통함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었다. 정조가 살옥 심리에 밤을 새워가며 정성을 쏟은 이유다.

정조는 수많은 살옥사건을 객관적으로 조사한, 검시 방법, 검안 문서 작성법 등을 두루 담은 지침서인 ‘무원록’에 기대 꼼꼼이 판결을 살폈다. ‘무원록’에 정통한 정조는, ‘사망 후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 처럼 위장한 경우 액흔이 흰빛을 띤다’는 무원록의 기록을 들어 범행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범인을 찾거나 피해자를 구한 사례들이 무수했다.

저자는 “정조가 살옥 심리를 숙고한 배경에는 사회가 ‘부당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느낌’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개의 사건을 심리하면서 어떤 이에게 주어져야 할 ‘적절한 존중’, 다시 말해 사정을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사실로 인해 백성들은 ‘행정을 신뢰’했을 뿐 아니라 ‘명예 추구의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정조학 총서/백승호 외 지음/휴머니스트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