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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한진 생가 ‘오고당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조선후기 청빈의 삶 ‘명의’

왕실의 초빙, 부귀영화를 거절한 채 시골에서 백성들의 병을 고치는데 평생을 보낸 조선후기 청빈 명의 박한진(朴翰鎭·1815~1893)의 허름한 옛집이 국가민속문화재(제298호)가 됐다. 제국황제의 초빙을 거절하고 인술에 몰두한 히포크라테스의 조선판이다.

경북 봉화 봉성면 박 명의의 집, ‘오고당 고택’(사진)은 자그마한 본채와 낡은 별채로 구성된, 누가 봐도 필부필부의 집으로, 지어진지 올해 꼭 200년 됐다.

10일 문화재청과 ‘오고선생 유고집’에 따르면, 시골에서 인술을 베풀며 살던 박 명의가 병을 잘 고친다는 입소문이 왕실에까지 전해지고, 박 명의는 61세 되던 1875년(고종 12년) 왕실의 부름으로 상경, 헌종의 생모인 조대비 신정왕후(1808~1890)의 병환을 고쳤다.

임금이 이를 치하해 ‘명가전만리(명성이 만리에 전해진다)’라면서 만리(萬里)라는 호를 내리고 벼슬을 주려 했지만, 박 명의는 거듭 사양했다. 고종은 공식적인 치하와 발탁이 어렵자, ‘오고(五高)’라는 우호(우정어린 별호)를 하사했다는 것이다.

박한진의의 치료로 병을 고친 조대비도 여러 차례 친필편지를 보내 가까이 있어달라고 했지만 박한진은 이를 사양하고 7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향리에서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의술을 펼쳤다.

그럭저럭 먹고 사는 농부의 집이라도 본채와 외양간을 분리하지만, 이 집은 창고, 외양간 등 따로 있어야 할 것들을 본채 내에 다 두었다. 질박한 그의 생애가 엿보인다. 오고당 별채엔 집안 여인들이 기거한다.

이처럼 모든 것이 본채에 다 들어있으면 환기와 채광 등 문제가 생겨 지붕 용마루 아래에 구멍을 내는데, 그래서 ‘까치구멍집’이라 부른다. 통상 까치구멍집이 초가인데 비해 오고당 고택은 기와를 얹은 것이 색다르다.

당대 최고 명의의 고택인데, “당시 민가(농촌 평민가옥)의 양식을 연구할 사례”라는 전문가의 논평이 신선하다. 오래도록 낮은 곳에 임하고, 청빈한 자세로 백성을 보살핀 박한진의 삶은 명예·권력·돈 모두를 다 가지려는 요즘 탐욕 세태를 꾸짖는다.

함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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