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개를 사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성전자 제공] |
[헤럴드경제 천예선 기자] 25일 타계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3남 5녀중 일곱째였다.
3살까지 경남 의령 외할머니 손에서 크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어머니와 형제를 만났다. 유년시절은 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보냈다. 호암이 대구 서문시장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하던 시절이었다.
어린시절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
유년기를 대구에서 보낸 이 회장은 사업확장에 나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947년 상경했다.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마산, 대구, 부산으로 피난생활을 했다. 1953년 부산사범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던 때 아버지의 엄명을 받들어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이 회장은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 외톨이 소년이었던 이 회장에 개는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훗날 이 회장은 “나의 첫사랑은 페니키즈(일본에서 처음 기른 애완견)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애완견 기르기는 취미가 돼 1979년엔 일본 세계견종종합전시회에 순종 진돗개 한 쌍을 직접 출전시켰다. 진돗개 순종을 찾겠다며 한남동 자택에서 150마리까지 키워보기도 했다.
이병철 선대회장과 이건희(오른쪽) 회장 [삼성전자 제공] |
초등학교 시절부터 유독 과학탐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평생 즐겨 쓴 휘호가 무한탐구(無限探究)였다. 기계에 대한 관심도 그때 생겨났다. 미국 유학시절 자동차에 심취했던 이 회장은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동차 구조에 전문가 수준이 됐다.
일본 유학 시절엔 영화에 심취해 1200편 이상을 봤다. 레슬링에 빠져 프로 레슬러 역도산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이 회장은 서울사대부고 시절인 1959년 전국레슬링대회에 출전해 입상(웰터급)도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 어떤 승리에도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썼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신경영을 선언한 당시의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어릴 적부터 길렀다. 사대부고 친구인 홍사덕 전 의원은 이 회장이 고등학교 때부터 사람공부를 하는 눈이 남달랐다고 기억한다. 홍 의원은 이건희 회장에 대해 “고교시절 아버지가 한국 최고 부자였지만 배고프다며 도넛을 몇 개씩 먹어치우는 엉뚱하고 싱거운 친구였다”면서도 “이 회장은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가장 많이 한다’고 할 만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깊었다”고 회상했다.
서울사대부고를 나온 뒤에는 연세대에 합격했으나 호암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로 진학했다. 와세다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1987년 회장 취임 당시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
1967년 4월 홍라희 여사와 결혼 후 삼성 비서실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70년대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로 건너가 첨단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진출 기회를 잡는다. 반도체 사업이 그것이다.
서른 둘이었던 이건희는 순전히 자기 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그리고는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이전을 받아오려 애썼다. 페어차일드사에는 지분 30%를 내놓는 대신 기술을 받아오기도 했다. 256메가 D램의 신화는 이때부터 싹을 틔웠다.
1972년 장충동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한 이건희(맨위) 회장. 이병철(왼쪽) 선대회장이 어린 이재용 부회장을 안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
삼성그룹 후계자로서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은 1978년 8월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시작됐다.
이병철 창업주가 위암 판정을 받고 약 2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창업주는 1977년 닛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건희가 후계자”라고 공식화했다.
2004년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 이 회장은 1974년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한국반도체 인수를 반대하자 사재를 털어 사들여 반도체 사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전자 제공] |
이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은 부회장이 된지 9년이나 지난 뒤였다. 그가 삼성의 경영권을 승계하기까지는 엄청난 풍랑이 몰아쳤다. 1966년 불거진 이른바 ‘한비 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회장에 취임한 이후에도 건강문제와 사내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의 사내 비자금 '폭로'로 검찰 수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은 1999년에는 폐 부근의 림프절에 암세포가 발견돼 수술을 받았지만, 폐에 물이 차는 폐수종 증상이 나타났다.
2011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순간 이건희(가운데) 회장. 평창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뒤 이 회장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삼성전자 제공] |
이 회장은 검찰과 특검 수사도 각각 한 차례 받았다. 1995년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 당시 대검 청사로 불려가 중앙수사부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2003∼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와 2005년 안기부 X파일 도청사건 수사 당시에는 소환될 위기를 넘겼으나 2008년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비자금 조성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로 다시 조사를 받았다. 삼성 비자금 수사는 이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놓고 2선으로 물러나는 계기가 됐다.
이후 2010년 3월 회장직으로 경영에 복귀했지만 2014년 5월 호흡곤란증세로 쓰러져 6년 5개월간 투병생활을 했다. 그러다 2020년 10월 25일 영면에 들었다. 향년 7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