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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고 돌아 육상장으로…‘아시아의 스프린터’ 장재근 [메달리스트]
메달리스트 인터뷰 ⑥ 장재근

〈편집자주〉 우리나라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최초로 출전해 종합순위 32위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2004년 아테네 올림픽부터 꾸준히 10위 안에 진입하며 스포츠 강대국으로 도약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예정된 도쿄 올림픽은 2021년으로 미뤄졌지만 [메달리스트]를 통해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세요. [메달리스트]는 한국 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메달리스트를 만납니다.

[헤럴드경제] 장재근은 육상 불모지인 한국에서 단거리 최초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최초의 아시안게임 2연패, 아시아 육상 최초 유니버시아드대회 메달 수상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때는 에어로빅 강사로 변신해 국내에 에어로빅 붐을 일으켰고, 쇼핑호스트로도 성공하며 다재다능한 능력을 보여줬다. 지금은 다시 육상장으로 돌아와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는 장재근(58) 서울시청 육상감독을 만났다.

“나는 무관심 속 탄생한 깜짝 스타”

장재근은 자신을 ‘깜짝 스타’라고 표현했다. 초등학교 땐 배구를 했었고 중학교 땐 육상 장거리 선수로 활동했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결국엔 고등학교 때 단거리로 또 한번 종목을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원래 중장거리 선수였는데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는 거예요. 다른 종목을 하자니 누가 받아 주지도 않고. 할 수 있는 게 육상밖에 없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단거리를 시도해본 거죠.”

단거리로 전향한 장재근은 1978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200m 3위를 기록했다.

“제가 처음으로 딴 메달이에요. 그때 메달을 따고 나니까 육상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스프린터로 주목을 받게 된 건 1982년부터다. 그해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장재근은 200m와 100m에서 각각 금메달, 은메달을 획득했다.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딸 때 영상이 없어요. 우리나라 언론에서 관심이 없었거든요. 제가 금메달을 딸 거라고 아예 생각을 안 했으니까.(웃음) 한국 육상 단거리 최초로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고 나니까 그야말로 한순간에 스타가 됐어요. 제가 주택복권에도 나오고 초등학교 체육 교과서에도 실리고 했죠.”

1등으로 들어온 느낌은 어땠을까.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냥 좋다”고 말했다.

“그냥 붕 떠 있는 기분? 다른 건 별거 없었어요.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짧고 고통은 길지만 그 짧은 순간의 행복을 위해 고통을 참는다고 하잖아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아니 이 기분을 느끼려고 4년을 그 고생을 하나? 근데 그게 정답인 거 같아요. 메달 따는 그 순간의 행복은 참 짧아. 몇십 초? 근데 그 순간 때문에 그 노력을 하는 것 같아요.”

장재근은 뉴델리 아시안게임 이후에도 기록 행진을 이어나갔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선 아시아 선수 최초로 3위를 기록했고,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선 200m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또 이듬해 열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했다.

“언론에서 장재근은 무조건 금메달이라고 이야기를 해서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대회 당일에 체조하는 척 무릎 꿇고 엎드려서 진짜 제가 아는 모든 신한테 빌었어요. 한 번만 도와달라고. 사람이 불안하면 눈빛이 흔들리잖아요. 그걸 라이벌 선수들한테 보이기 싫어서 선글라스를 썼더니 한국에선 또 건방지다고 뭐라 하더라고요.(웃음)”

한편 그는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팬이 있었냐는 물음에 “팬이 없었다”고 답했다.

“팬 없었어요. 그땐 유재학, 허재, 김유택 이런 농구선수들이 인기가 많았죠. 저는 그냥 육상에서 1등 했다니까 관심을 가져줬던 거고. 저는 은퇴하고 에어로빅할 때 아줌마들이 좋아해 줬죠.(웃음)”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200m 결승에서 장재근이 뛰고 있다.

“육상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해”

장재근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이후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예선전을 뛰는데 2등으로 들어왔어요. 딱 안 되겠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결승에서 7등 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은퇴했죠. 주위에서 말렸는데 제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정말 건방졌죠. 은퇴 후에 뭘 하면 좋을지 생각을 해봤어야 했는데 폼 잡는다고 바로 그만뒀더니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은퇴 후 장재근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방송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육상 선수에서 에어로빅 강사로, 그리고 쇼핑호스트로 변신해 얼굴을 비췄다. 한편 ‘육상 영웅’에서 방송인의 삶을 선택한 그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도 적지 않았다.

“저보고 돈에 환장했대요. 사실 돈은 많이 벌었어요.(웃음) 근데 육상을 했던 사람이라 한편으로는 마음이 허했죠. 육상계로 돌아오고 싶었는데 ‘돈에 미쳐서 쫄쫄이 입고 쇼하더니 갑자기 여길 왜 와’ 이런 시선이 있다 보니까 못 오겠더라고요. 그러나 보니 제가 하는 건 에어로빅하고 홈쇼핑 판매. 이게 제 직업이 돼 버린 거죠. 저도 가정이 있고 먹여 살려야 하니까 그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장재근은 지난 1998년 국가대표 육상 코치로 돌아왔다. 현재는 서울시청 감독을 맡고 있다.

“천성은 못 속여요. 육상장에 나오면 너무 행복해. 여기서 누가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데 여기 나오면 그냥 행복해요. 중간에 돈도 많이 벌고 했는데, 그것보단 육상장에 있는 제 모습이 더 좋아요.”

2020년 잠실 보조경기장에서 만난 장재근 서울시청 육상 감독. [윤병찬 PD]

33년 만에 깨진 장재근의 한국 신기록

2018년, 장재근이 1985년 자카르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200m 20초41 한국 신기록이 0.01초 차이로 33년 만에 깨졌다. 박태건은 지난 2018년 정선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200m 결승에서 20초40으로 레이스를 마쳤다. 이에 장재근은 홀가분하다는 반응이다.

“물론 제 기록이 깨져서 서운하기는 하죠. 근데 33년이면 오래 했잖아요.(웃음)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이왕 깨진 기록, 큰 차이로 깨졌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점이죠.”

30년 넘게 기록 방어자로 살아온 장재근은 이제는 큰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행복을 좇고 싶다고 말한다.

“앞으로 제가 얼마만큼 더 활동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딱 10년 정도만 더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선수들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저는 제가 가진걸 선수들한테 주고 저는 우리 선수들이 가져오는 커피 한 잔, 그런 마음과 바꾸고 싶어요. 그게 행복인 것 같아요.”

정지은 기자/jungj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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