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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픈 가족사·피눈물 흘렸던 유학생활…인생 최고의 선택은 ‘결혼’
선친, 군사정권 때 탄압 받아
법·교육자의 길 선택에 큰 영향
선한 권력 잘 펴면 다수가 행복
“제겐 아이들이 너무 좋은 스승이죠”

“아버지가 긴급조치 9호 위반자셨어요. 중학교 물리 교사셨는데, 수업시간에 원전은 ‘쓰레기에 비싼 값을 지불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다가 간첩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셨어요. 재판에서 화해로 해결됐는데 당시 법관이 아버지의 제자셨더라구요. 당신께서도 전혀 모르셨데요. 그래서 법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김은경 금융감독원 소비자보호처장(부원장)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김 부원장 일생의 모토인 ‘선한 권력’을 머리에 각인시킨 이도 아버지다.

“저는 시위엔 안나갔어요. 아버지의 삶이 너무 불쌍했죠. 붙잡혀 가시고 경찰들에게 간첩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그러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거든요. 아버지 방법 말고 다른 걸로 해보자. 말 한번 잘못해서 ‘닭장차 타고 가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대통령보다 교수가 더 좋은 직업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중요하고 좋은 일이라고. 그래서 교육으로 힘을 키우자고 마음먹었어요. 한 사람이 10명을 키우고, 10명이 다시 더 늘어날 수 있는 게 교육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래서 김 부원장이 제자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법은 모든 것의 귀결 사항이다. 사회에선 법이란 그 자체가 권력이다. 배운 것을 잘 베풀면 그것이 선한 권력이 된다. 선한 권력을 가서 펼쳐라. 선한 권력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다수가 편안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사법시험 대신 교육자의 길을 택했지만, 그 역시 험로였다. 우리나라법은 대륙법 체계인데, 민사법은 독일이, 공법은 프랑스가 뿌리다. 그래서 독일로 유학을 갔다. 서툰 독일어 실력으로 떠났지만 보통 7년 정도 걸리는 박사 학위를 3년 반 만에 받았다.

“죽기 살기로 했어요. 이미 결혼을 했었고 아이도 있었죠. 유학 전 괴테 어학원을 3년을 다녔는데 동네 상점 갈 정도의 수준 밖에 안되더라구요. 어학도 공부도 할게 정말 많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 아르바이트까지 해야했어요. 번 돈 중에 일부는 형편이 어려워진 시댁에 보내드렸죠.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어요. 한국말 안하려고 한국인이란 말도 안했죠. 그때가 외환위기 때였거든요. 같이 공부했던 한국 학생들 가운데 굶어 죽은 이도 있었죠”

1999년 3월 29일 박사 논문이 통과됐고, 김 부원장은 4월 1일 귀국한다. 얼마후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이미 스물 한살에 어머니를 여읜 김 부원장에게 남은 가족은 더 없이 소중한 존재가 됐다. 김 부원장은 본인 인생의 ‘선택 세가지’ 가운데 결혼을 첫 손가락에 꼽는다. 다음이 법학을 택한 것과 보험법에 매진한 것이다.

“사랑이 매우 중요해요. 사람에게 사랑이란 의리라죠. 의리를 지키는 게 사랑이구요. 착한 사람이 좋아요. 착하면 마음이 편하잖아요. 돈이 없으면 몸만 불편하면 되죠. 너무나 좋은 스승이 바로 제 아이들이에요. 가족이긴 하지만 토론을 정말 많이 하죠”

정리=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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