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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유시장 ‘뉴노멀’ 이끈 美셰일…뉴노멀 희생자로
2010년대 중반 저유가 위기 경영 효율화로 돌파
2020년 공급과잉·코로나 여파 수요감소 이중고
생산단가 높고 재무구조 갈수록 악화 ‘생사 기로’
사우디·러시아 석유시장 패권 ‘치킨게임’도 변수

2010년대 중반 미국 셰일업체들은 경쟁력이 뭔지 보여준 경영학 교과서였다. 2014년 석유수출국기구(OECD)는 유가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려 시장 영향력을 키우고 미국 셰일업체를 고사시키기로 했다. 유가(WTI)는 2016년초 30달러 선이 붕괴되면서 배럴당 26.2달러까지 떨어졌다.

많은 미국 에너지 업체가 파산했고 미국의 산유량은 감소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주도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수년간 재정적자를 떠안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성과를 달성한 듯 보였다.

하지만 셰일업체는 유례없을 정도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 비용 절감에 성공하며 경쟁력을 키웠다. 그리고 강해진 셰일업체는 유가가 40달러 선을 넘어서며 반등하자 곧바로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2017년 중반 종전의 원유생산량을 회복한 미국은 2018년 11월 마지막주 주간 단위로 첫 석유 순수출을 기록한데 이어 지난해 9월에는 월간 단위로도 순수출을 기록하며 명실상부한 석유 수출국이 됐다.

러시아에 이어 미국까지 석유 시장에서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인류 역사상 최대 카르텔인 OPEC의 영향력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이후 글로벌 석유 시장은 산유국 공동의 이익이 아닌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각자도생의 시장으로 점차 변모했다. 그리고 2020년 들어 미국 셰일업체들은 자신들이 재편한 시장의 새 질서에 가장 먼저 희생당할 위기에 처하는 역설에 직면했다.

블룸버그의 석유시장 전략가 줄리언 리는 “현재는 누가 저장 탱크를 많이 확보할 수 있고 누가 손해를 보고 있는지에 따라 시장에 의해 원유 감산이 이뤄질 것”이라며 “자유시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2016년과 2020년, 같은 유가·다른 상황=사우디가 4월부터 매일 1000만배럴을 증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촉발된 유가 하락으로 WTI는 배럴당 20달러 선을 위협받고 있다. 유가만 놓고 보면 2016년과 비슷하다.

셰일업체들의 대응방법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추기 수를 줄이고 인력도 줄이고 있다. 고강도 구조조정을 대비한 현금 확보에 나서는 모습도 포착된다. 급기야 대규모 자본투자(CAPEX)를 절반 이상 줄이는 기업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급이 늘어난 것 못지 않게 수요가 줄었다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세계를 휩쓸면서 석유 수요가 급감했다. 대부분의 나라가 이동제한 조치를 취하면서 비행기가 공항에 멈춰서 있다. 고가 제트유 수요가 뚝 끊긴 것이다. 여기에 미국 전역의 차량 이동량은 한 달 새 30%가량 금감했다.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등 코로나19 영향이 큰 지역의 교통량은 40~50%나 줄었다.

골드만삭스는 2분기 글로벌 석유 수요가 전년동기 대비 12.1%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최근 코로나19로 30억명 정도의 인구가 자택에 머물게 되면서 석유수요가 하루에 2000만배럴씩 감소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셰일업체들이 생산 효율화를 꾀할 여지가 크지 않은 것도 2016년과 다르다. 로이터통신은 대부분의 셰일업체가 올해 유가 전망치를 55~65달러로 두고 예산을 책정했다고 설명했다.

에너지정보업체 우드 맥킨지에 따르면 셰일업체의 2020년 배럴당 원유 평균 생산 단가는 53달러로, 사우디(10달러), 러시아(27달러)보다 크게 높다. 댈러스 연방은행의 조사결과도 비슷하다. 셰일업체들이 지난해 새로 시추한 유정의 손익분기점은 배럴당 50달러선을 넘나든다. 셰일 추출을 위한 수압파쇄법에는 모래가 많이 필요한데 이 모래 가격이 올랐다. 또 고용 증가와 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부 부담도 손익분기점을 높였다. 유정 개발이 빨라지고 많아지면서 한 유정에서 퍼내는 원유량이 감소한 것도 이유다. 현재 유가 수준이 지속된다면 인력 조정 같은 임시 방편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악화된 부채 구조는 파산 위험으로 다가온다. 이 문제는 단기간 해결하기 어렵다.

▶셰일업체는 또 다른 혁신을 보여줄까?=미국 에너지 기업들의 재무구조는 2017년 들어 빠르게 악화됐다.

2017년 이후 에너지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물량의 절반 이상인 53.9%가 투기등급(CC이하 및 등급외)이다. BBB+~BBB-등급도 33%에 달한다. 불과 13%가량만이 AA+~A-등급이다. 그럼에도 회사채 발행은 잘됐다. 우호적인 국제유가가 미국 에너지 기업들을 더받쳤고 저금리 환경에서의 투자수요가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다. 현재 미국 에너지기업 중 A등급은 셰브론, 엑손모빌 등 메이저 업체와 셰일업체 중에선 EOG와 코노코필립스 정도다.

이미 지난해 50~60달러 수준의 유가 박스권에서 파산한 업체가 41개에 달한 것을 고려할 때 올해 코로나19와 석유전쟁이 불러온 회사채 시장의 냉각은 자금 조달 비용을 더욱 높여 부채는 많고 현금은 적은 셰일업체들에게 치명적이 될 수 있다. 부채가 400억달러에 달하는 옥시덴탈은 CAPEX를 30%나 삭감한다는 계획에도 주가가 한 달 새 3분의 1토막이 났다.

로이터는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이미 많은 셰일업체들이 채권자와 협상을 위해 구조조정 전담 기업과 협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투자은행 에버코어ISI의 스티븐 리처드슨 셰일연구원은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시장 환경은) 비경제적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가뜩이나 전기차 확산, 신재생에너지 증가, 기후변화 경각심 등으로 뉴욕 월스트리트의 시선이 차갑게 변해가는 걸 느낀 셰일업체들은 이번 위기로 투자자들이 아예 발길을 끊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다. 셰일업체들이 인수합병 등을 통한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재탄생하고 효율성 극대화로 낮은 유가에도 견딜 수 있게 되더라도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모두가 셰일업체의 연쇄도산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아니다. 향후 5년 간 미국 에너지 기업들이 상환해야 한느 부채는 860억달러 규모이지만 다행히 올해 만기가 예정된 건 53억달러 수준이다. 자본시장 경색에 따른 단기자금 조달에 어려움은 있겠지만 대부분 부채비율이 100% 미만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감내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고래 싸움은 언제까지?=관건은 역시 사우디와 러시아가 벌이는 치킨게임이 언제 끝나느냐에 달렸다. 비베크 다르 호주 커먼웰스뱅크 원자재 연구원은 “수요 우려가 치명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시장을 무너뜨리고 있는 건 사우디와 러시아가 최근 행보를 이어가려 한다는 신호”라고 밝혔다.

셰일업체들에겐 안타깝지만 쉽사리 해결될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사우디의 증산 발표 이후 아랍에미리트(UAE)와 쿠웨이트, 이라크 등이 증산과 수출가격 인하에 나선 상황이다.

사우디와 러시아 중 어느 나라가 먼저 손을 들지도 예측이 쉽지 않다. 사우디의 생산단가는 배럴당 10달러로, 러시아(27달러)보다 낮다. 증산 능력 면에서도 사우디는 176만배럴로, 러시아(50만배럴)를 크게 웃돈다.

하지만 사우디 경제는 석유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우디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석유산업이 차지하고 있고 석유부문이 정부 수입의 67.5%를 차지한다. 또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비전 2030’을 위해선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 사우디가 재정수지 적자를 피하기 위한 적정유가는 배럴당 88달러 선으로 추정된다. 반면 러시아는 41달러 정도로 훨씬 낮다. 당장 쓸 수 있는 카드는 사우디가 많지만 게임을 끌고갈 뒷배는 러시아가 더 강한 셈이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이번 석유전쟁을 벌이는 궁극적 목표가 미국 셰일업체, 나아가 미국의 석유패권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은 이번 석유전쟁의 실타래를 복잡하게 만든다.

그동안 OPEC과 손잡고 감산을 하느라 시장 점유율을 미국에 빼앗긴 러시아는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해 12월 독일까지 가스관을 연결하는 노드스트림2 프로젝트를 제재한데 이어 지난 2월 베네수엘라 지원 혐의로 러시아 최대 원유생산업체 로즈네프트의 트레이딩 자회사를 제재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이고르 세친 로즈네프트 최고경영자(CEO)는 “다른 산유국들이 증산하는 상황에서 (OPEC과 러시아가) 감산을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면서 “미국 셰일업체가 시장을 떠나면 유가가 배럴당 60달러로 반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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