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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상의 오지랖] 황교안의 ‘무슨 사태’, 바둑으로 따지면 ‘자충수’인 까닭
황교안대표 발언에 여전히 정치권 공방
한국당은 “5·18민주화운동 관련 아니다”
“허위사실유포·명예훼손 강력 법적 대응”
여야, 당장 총선 앞둔 ‘막말주의보’ 발령
역대 설화로 본 총선, 그것에 교훈 담겨
4·15 총선 서울 종로에 출마를 선언한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지난 9일 서울 성균관대학교 인근 분식점을 찾아 어묵을 먹고 있다. [연합]

바둑은 공격만 잘한다고 이기는게 아니다. 일단 수비가 튼튼해야 한다. 철벽수비망을 쳐놓은뒤 상대방 약점이 노출됐다 싶으면 나비같이 파고들어 적의 세력을 초토화시키면 승리 확률이 높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내 돌이 두집 내고 산뒤 상대방 돌을 잡으러 간다)라는 바둑격언은 그래서 나왔다. 한때 세계 최강의 공격수로 불렸던 유창혁 프로9단 역시 그랬다. 그가 세계 일류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최강의 공격력 외에도 막강의 수비력 또한 갖췄기 때문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돌부처’ 닉네임을 가진 이창호 프로9단은 수비 바둑의 절대강자였다. 한때 세계 바둑을 호령했던 그는 절대확신이 없으면 좀처럼 칼(공격)을 빼지 않았다. 두터운 세력을 키운뒤 실리를 쫓았다. 웬만하면 싸움을 하지 않았다. ‘싸움을 걸어올만 한데 자꾸 피하는’ 이창호 분위기에 휩쓸리다보면 상대방은 낙관에 빠지곤 했고, 그러다 어느순간 불리함을 깨닫고 무리한 싸움을 걸어와 자멸하곤 했다.

동시대인으로 한국바둑계의 쌍두마차였던 이창호나 유창혁의 바둑스타일은 이토록 달랐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실착(失着·잘못 둔 수)을 가장 경계했다. 즉, 실수를 최대한 줄이려 한 것이다. 막강한 공격력, 완벽한 방어력을 구축했다고 해도 ‘실착’ 하나면 곧장 패배로 연결될 수 있는게 바둑이다. 이 점을 잘 알았다. 바둑에서의 실수는 허착(虛着·헛수·두긴 두었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수)이나 자충수(自充手·자기의 수를 줄이는, 오히려 손해의 돌) 등을 뜻한다. 이창호나 유창혁이 각각 수비바둑과 공격바둑에서 자기 색깔을 뚜렷하게 각인시키며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바둑교훈을 늘 실천했기 때문일게다. 하긴 초반, 중반에 사귀생을 하고 중원세력을 호탕하게 포진시켰지만 종국에서 ‘어이없는 한 수’로 일시에 무너진 바둑을 한두번 봤나. 90분 내내 상대방 진영을 두드리다가 막판 1분을 남기고 수비망이 뚫려 골을 먹거나, 자살골을 기록해 허망하게 패하는 축구처럼 말이다.

왜 갑자기 바둑 얘기를 꺼냈을까.

종로 출마와 함께 선거전을 뛰고 있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큰 실착을 뒀다. 황 대표로선 실착이 아니라며 억울하다고 하니 그 진실에 대한 재검토는 필요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때 ‘의문의 수’ 하나가 나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12일 정치권에 따르면, 황 대표는 지난 9일 모교인 성균관대학교를 방문했다. 강력한 상대의 이낙연 전 총리가 일찌감치 종로 출마를 선언한뒤라 뒤늦게라도 열심히 지역을 찾아 표심얻기에 나선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인근 분식점을 찾아 주인과 나눈 대화가 화근이었다. 황 대표는 이 자리에서 “1980년 그때 하여튼 무슨 사태가 있었죠. 그래서 학교가 휴교됐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당장 더불어민주당은 공세에 나섰다. 그 ‘무슨 사태’는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뜻하는 것이며 그것을 ‘사태’라고 표현했다며 들고 일어섰다. 광주 지역 등 지역 여론은 황 대표가 막말을 했다며 비판 수위를 펄펄 끓어올렸다. 공당의 수장이라는 이의 역사인식이 그 정도냐며 십자포화를 날린 것이다.

화들짝놀란 자유한국당은 옹호에 나섰다. 황 대표의 발언은 5·18민주화운동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며 이 발언을 왜곡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것엔 강력 대응하겠다고 했다. 한국당은 “황 대표가 당시 언급한 내용은 1980년 5월 17일에 있었던 휴교령에 따라 대학을 다닐 수 없게 되었던 상황에 대한 것”이라며 “앞으로 발생하는 허위사실유포와 명예훼손에는 강력한 법적대응에 나설 것”이라고까지 했다.

한국당의 이같은 ‘배수진성 대응’은 이슈의 폭발성 때문으로 보인다.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시각과 맞물린 이슈는 정치권 최대 이슈 중 하나다. 지난해 2월 이종명·김순례 한국당 의원의 “5·18은 폭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된 것”, “종북좌파가 5·18 유공자란 괴물집단을 만들었다” 등의 발언으로 인해 한국당은 진보진영의 총공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올해 총선을 앞두고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한국당으로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서 긴급히 무마에 나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하지만 한국당의 강경 대응에도 황 대표 발언은 그 진위와 역시인식 뒷말과 함께 여진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기자는 황 대표가 5·18민주화운동을 ‘사태’라고 표현하며 그것을 폄훼할 의도로 얘기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황 대표가 정치초보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분별력이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모처럼 모교를 찾으니 당시 시국의 어지러움과 학창시절이 오버랩돼 이런 기억을 끄집어냈을 것이다. ‘사태’라는 표현도 무의식적으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 세대는 교과서를 통해 웬만한 메가톤급 역사적 사실에 대해 ‘사태’라고 배웠다. 우리 세대의 어떤 친구들은 그래서 가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옛날 일을 끄집어낼때 무심결에 ‘사태’라는 단어를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러다가 옆사람이 눈총을 주면 ‘아, 운동’, 그렇게 재빨리 말을 바꾸기도 한다. 교육이란 그래서 참 무섭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점이 바뀌고 재규정된 것을 충분히 알고는 있지만 가끔 입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학교때 배운 단어일때가 많다. 황 대표의 ‘사태’ 운운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의 경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치인의 입은 정치 그 자체요, 유권자 크게는 국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황 대표는 아예 ‘사태’라는 말을 입밖으로 끄집어내선 안됐다. 무의식적인 단어동원에도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게 정치인의 숙명이다. 게다가 황 대표는 제1야당의 대표이자, 대한민국 정치1번지인 종로에서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겠다고 나선 이다. 오해의 꼬투리를 잡힐 만한 행동 외에도 말한마디 한마디를 스스로 필터링해야 했다. 기자가 황 대표의 발언을 놓고 그 진위는 둘째치고라도 실언이자, 실착이라고 본 것은 이 때문이다.

황 대표는 이같은 자기검열이 너무 혹독하다고 여겼다면 종로 출마는 아예 꿈도 꾸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황 대표는 물론 이번 총선을 노리고 있는 정치인들, 훗날 정치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서울 종로에 출마하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낙연 전 총리가 10일 종로구민회관을 찾아 주민과 인사하고(왼쪽),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하림각에서 열린 핵심당원 간담회에서 참석자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

하긴 이를 모르는 정치인이 있겠나. 자신의 세치혀가 훗날 주홍글씨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역시 모르는 정치인이 있겠는가. 실천의 문제로 돌릴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총선 등 선거를 앞두고 이같은 ‘설화’는 그치지 않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보면 그 ‘실천’이 정말 어렵긴 어려운가 보다.

전문가들은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그토록 조심조심하려 하고는 있지만 실언과 막말이 나오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치인은 주로 관심, 매력, 지지 등 3단계로 정치력을 실현시키는 데 그 첫 단계인 관심을 받기 위해 막말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관심을 받는 가장 쉬운 길이 자극적 언어 사용이기 때문”(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주목받고 싶은 정치인은 (자신에게)충성도가 높은 극단 세력 말을 더 들을 수밖에 없는데, 이들 의견만 듣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인 것 같은 환상에 빠져 자신감이 생긴다”(황태순 정치평론가)는 게 대표적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부 초년병 기자이던 시절에 만났던 한 국회의원의 말이 생각난다. 당시에도 한 유력주자의 막말 논란으로 여야 공방으로 들썩거릴때였다. 장황하지만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설화에 오르고 싶은 정치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치인이라는 게 그래요. 하루종일 사람을 만나는데, 그때그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아예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야 하죠. 사람을 만나 얘기를 안하면 ‘아, 정말 점잖으신 분이구나’라고 여기는 사람 없어요. ‘정치인답지 않는데’라고 하죠. 그러니 이사람 저사람 만나 같은 얘기를 하루에도 수십차례 거듭해야 합니다. 나중에 밤늦게 집으로 돌아갈땐 입이 다 얼얼해요. 혀가 잘 안굴러가요. 그러다보면 정말 헛소리도 나오게 돼요. 머릿속은 그렇지 않은데 의도하지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거죠. 대한민국 국회의원들, 설화를 한번 겪은 사람들 대부분 그렇게 얘기해요. 그런 뜻으로 얘기한게 아닌데, 언론을 타면서 일은 더 커지죠. 후회해봤자 엎질러진 물이긴 하지만요.”

어느정도 진정성이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 많다보면, 말을 많이할 수 밖에 없다보면 그만큼 실수할 확률도 커진다는 것을 얘기한 것일 게다.

문제는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의 정치인 발언은 선거판은 물론 정국 전체를 뒤흔들 소재가 되곤 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자충수’로 인해 선거전체가 틀어질 수 있는 것이다. 황 대표 발언으로 한국당이 당장 강경대응 방침을 밝히고 문밖단속에 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민주당이 총선을 앞두고 총선 후보자들의 ‘막말 주의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읽힌다.

지난 2018년 지방선거 와중에 당시 한국당 정태옥 대변인은 한 방송에 출연해 “서울 살던 사람이 이혼하거나 직장을 잃으면 부천을 가고, 부천에 있다가 살기 어려워지면 인천 중구나 남구로 간다”고 했다. 이른바 ‘이부망천’ 발언이었다. 같은 당 유정복 인천시장을 거들기 위한 말이었으나, 이 발언으로 엄청난 역풍을 맞았다. 후폭풍은 엄청났다. 정 대변인은 선거직전 한국당을 탈당해야 했다.

너무많이 회자돼서 자세히 인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2004년 총선 직전 생긴 당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하발언’ 논란 역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정 의장은 그때 대구를 찾아 청년층과 인터뷰를 했는데, 60~70대 이상 어르신들은 투표하지 않고 집에서 쉬셔도 괜찮지만 젊은이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걸려있어서 투표를 꼭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 발언이 알려지면서 ‘노인폄하’ 논란이 들끓었고, 이 프레임은 정 의장 정치인생에 걸쳐 줄곧 괴롭혀왔다. 몇년전 당시 정 의장 측근이었던 이를 만났는데, 그는 그때의 일이 두고두고 억울하다고 했다. 발언의 방점이 ‘투표하지 않는 성향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선거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에 청년들이 반드시 투표해야 한다’는 쪽이었는데, 앞뒤 자르고 ‘어르신들은 쉬시라’는 것에 포인트를 두다보니 180도 왜곡됐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마디가 그렇게 변질될 줄 몰랐다. 어르신들 투표하지 말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었다.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시라. 세상 무섭더라. 늦었지만 그때 발언의 진의는 명백히 하고 싶다”고 했다.

실언과 막말이 주홍글씨가 된 경우는 꼭 정치쪽만은 아니다. 교육부 고위 관료의 “민중은 개 돼지”라는 발언은 역대급 막말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엎질러진 물, 되담을 수는 절대로 없다.

암튼 정치인의 세치혀에 총선이 다가올수록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사실이다. 실착, 자충수, 무리수는 어디서든 나올 것이다. 실착이나 자충수를 누가 덜 둘 것인가. 이번 총선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헤럴드경제 기자, 마케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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