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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경영 신화에서 몰락까지…파란만장 김우중 생애
31세 대우실업 창업, 30년만에 재계 2위…외환위기 직후 해체
장기 해외도피 중 '제2의 고향' 베트남에서 재기 모색

1999년 4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과 함께 대우 디자인포럼에서 자동차 모형 제작과정을 살펴보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생전 모습. [연합]

[헤럴드경제=조용직 기자]9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재계 2위 그룹의 총수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해외도피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삼성과 현대를 키운 이병철과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김우중 전 회장은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1.5세대 창업가로 분류된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그의 저서명으로 대표될 수 있는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 신화는 만 30세 때인 1967년부터 싹을 틔웠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하던 ‘청년 김우중’은 대도섬유의 도재환 씨와 손잡고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자본금 500만원으로 출범한 대우실업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렸던 고인은 동남아에서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호주 시드니)를 세웠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이어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고, 19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대우그룹은 또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김 전 회장의 거침없는 확장 경영의 결과 창업 15년만에 대우는 자산 규모 국내 4대 재벌로 성장했다.

1992년 1월 26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귀국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공항 귀빈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방북성과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대우는 19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 명을 기록했다. 당시 고인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이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는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을 불러왔다.

19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그룹은 끝내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9253억 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말년에는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등 명예회복에 주력했다.

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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