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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된 미래 ‘힙지로’] ①촌스러움과 멋스러움 사이…2030의 ‘불편한 보물찾기’
-을지로 인쇄골목 사이에 위치한 간판없는 가게만 수십개
-SNS 통해 2030세대에게 입소문…‘나만의 아지트’로 인기
-을지로 찾는 사람 늘었지만…‘젠트리피케이션’ 가능성은 낮아


을지로 인쇄골목에 위치한 카페 ‘클래직’ [사진=박자연 인턴기자]

[헤럴드경제=박로명 기자, 박상현ㆍ박자연 인턴기자] “여기가 맞나? 아닌 것 같은데….”

지난 18일 오후 4시 40분께 서울 중구 을지로3가. 한 20대 여성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스마트폰 화면과 우중충한 거리를 번갈아봤다. 허름한 인쇄소 두 곳을 지나치는 듯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그 사이로 난 골목으로 들어갔다. ‘만수메달’이라는 새빨간 간판을 보고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클래직’이라고 휘갈겨진 작은 입간판을 발견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카페 아님, 화장실도 아님’이라는 경고문이 붙여진 문이 보였고, 그 옆이 비로소 카페임을 알 수 있었다. 

을지로에 위치한 칵테일바 ‘감각의 제국’ [사진=박자연 인턴기자]
을지로에 위치한 칵테일바 ‘감각의 제국’ [사진=박자연 인턴기자]

오밀조밀 얽혀있는 낡은 가게와 건물과 건물 틈 사이로 난 작은 골목이 어우러진 풍경의 을지로는 해가 뉘엿뉘엿 할때면 ‘힙지로’로 옷을 갈아입는다. 촌스러움과 멋스러움의 행복한(?) 동거는 2030세대의 ‘갬성’과 5060의 ‘추억팔이’와 교차한다. 나만의 아지트를 찾아가는 불편한 여정, 허름한 인쇄소와 공구상 사이에서 발견하는 의외성, 번잡한 강남대로 한 복판에선 느낄 수 없는 켜켜이 쌓인 삶의 스토리는 ‘힙지로’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힘이 되고 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휘발성 강한 욕망으로 꿈트는 ‘워너비 힙스타’는 복잡다단한 한국사회의 감성과 맞물려 한국형 도시와 소비행태에 신선한 물음표를 던져주고 있다.

을지로의 가장 ‘힙’(hip)한 카페 중 하나로 꼽히는 ‘클래직’. 인쇄골목 속에 꽁꽁 숨어있어 어쩐지 불친절하지만,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얼마든지 불편함을 감내할 준비가 돼있다. 새로운 공간이 낡은 공간의 틈 속으로 스며들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날 카페를 방문한 임태산(24) 씨는 “을지로의 카페들은 ‘나만을 위한 작은 공간’ 같다”라며 “사장님의 인테리어나 소품 취향 등 다 똑같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을지로에 위치한 음식점 ‘을지로 미팅룸’ [사진=박상현 인턴기자]
을지로에 위치한 음식점 ‘을지로 미팅룸’ [사진=박상현 인턴기자]

중장년층만 찾던 노쇠한 을지로 상권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6년부터다. 연남동ㆍ망원동 등 소위 ‘뜨는’ 상권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던 예비 창업자들은 임대료가 낮은 지역을 찾기 시작했다. 임수지 ‘쎄투’ 사장은 “2년 전 동대문에 터를 잡으려는 계획이 무산되고 임대료가 가장 낮은 곳을 찾다보니 흘러흘러 을지로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고영환 ‘을지로 미팅룸’ 사장도 “2017년 개업할 당시 을지로는 권리금 없이 들어올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을지로에 불시착한 작은 카페ㆍ음식점ㆍ주점ㆍ칵테일바 등은 신구(新舊)가 조화된 상권을 형성하게 됐다.

이들 가게는 하나같이 간판이 없는 게 특징이다. 장소를 유추할 수 있는 표시조차 없는 곳도 있고, 작은 포스터를 전단지처럼 붙여놓은 곳도 있다. 이에 대해 임 사장은 “건물이 간판을 달기엔 너무 지저분해 그대로 뒀다”고 했다. 고 사장은 “인쇄골목 특유의 분위기를 해칠까봐 간판을 고민하던 사이 손님이 계속 늘어 그냥 지내게 됐다”고 했다. 가는 길도 험난하다. 1층에 위치한 매장은 인쇄소와 철공소뿐이고, 카페나 음식점에 가려면 보통 3~5층까지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서울라이트’ㆍ‘감각의 제국’ㆍ‘호텔수선화’ㆍ‘평균율’ㆍ‘사색’ㆍ‘을지로보석’ 등 인기 장소들이 모두 그렇다. 

힙지로 주요 노포 약도

이 같은 희소성은 오히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인기와 맞물려 마케팅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2030세대는 인스타그램ㆍ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장소를 찾아 방문한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가게일수록 ‘아무나 찾아오지 못하는 곳’이라는 인식을 남겨 궁금증을 유발한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젊은 소비자들은 강남이나 명동같이 뻔한 장소보다 을지로처럼 기발한 장소를 선호한다”며 “SNS를 통해 숨어있는 맛집을 찾아가며 ‘보물찾기’와 같은 재미를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을지로 가게들도 따로 비용을 투입하지 않고 SNS를 통해 홍보를 한다.

을지로의 또다른 매력은 ‘흉내낼 수 없는 감성’이다.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진 사장들이 각기 다른 공간에 둥지를 텄다. 빛이 바랜 공간은 낯선 취향을 입고 제 2의 삶을 산다. 누군가는 을지로가 새로움(new)과 복고(retro)가 더해진 ‘뉴트로’ 트렌드의 최전선이라고 말한다. 이날 을지로를 찾은 남희지(24) 씨는 “을지로는 홍대ㆍ강남 등과 비교해 감성부터 다르다”며 “뉴트로가 을지로만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칵테일바 ‘감각의 제국’은 가장 독특한 콘셉트로 무장한 가게 중 하나다. ‘절제의 미’라고는 모르는 흥건(가명ㆍ39) 씨가 과거 불법 안마업소였던 곳을 개조해 만든 공간이다. 벽면에는 거대한 둘리 트로피가 불쑥 튀어나와 있고 배우 박영규ㆍ개그맨 심형래ㆍ박근혜 전대통령 탄핵을 선고한 이정미 재판관의 사진 등이 우스꽝스럽게 붙어있다. 가게 곳곳에는 목욕탕의 세신 탁자ㆍ독서실의 1인용 책상ㆍ파라솔들이 널부러져 있다. 코흘리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구슬과 공기놀이ㆍ망원경ㆍ스티커 등도 촌스러운듯 멋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흥건 씨는 “저는 굉장히 얕고 넓은, 어떻게 보면 정신없고 자유로운 취향을 갖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표현하기엔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을지로가 제격이었다”며 “손님들도 20대 초반에서부터 30대 중후반까지 다양하고 엄마와 딸이 같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에 뉴트로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는데, 2030대들은 단순히 옛것을 오래된 것으로만 보지 않고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을지로 골목이 입소문을 타면서 인근에 가게를 내려는 사람도 늘었다. 을지로에서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운영하는 정현철 씨는 “올해 들어 이쪽(중부경찰서앞 사거리) 거리에만 카페, 와인바 등이 15개 이상 생겼다”며 “일부 상가를 중심으로 젊은 유동인구가 생기면서 임대료도 2층 20평 기준 월세 150만원에서 200만 원가량으로 올랐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임대료 상승으로 기존 임차인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우려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젠트리피케이션 가능성은 낮다고 입을 모은다. 인근에서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운영하는 박상주 씨는 “을지로는 단층 위주인 익선동과 달리 매물이 3~5층 위주로 나온다”며 “건물도 낡았고 화장실도 개보수가 필요해 프랜차이즈가 진입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기존 임차인이 빠져나갈만큼 임대료가 오르려면 을지로 상권이 폭발적으로 커져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그럴 우려가 없다”고 했다.

dod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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