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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 카페] ‘법조계 신성가족’ 그들만의 계보…
“해방은 벼락처럼 찾아왔다. 시스템을 만들어 운용하던 일본인 판검사가 사라지고 빈자리가 넘쳐났다. (…)미 군정과 즉시 협력이 가능했던 한민당 세력이 먼저 주도권을 장악했다. 친일의 오점은 있으나 학력·경력·재력 면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세력이었다.법원·검찰·경찰은 곧바로 한민당의 직접적인 통제범위에 들어갔다.”(‘법률가들’에서)
김두식 교수 ‘대한민국 권력의 한축’ 추적
일제시대서 미자격자까지 4개그룹 분석
한국전쟁으로 법조인 행방불명 등 내상
좌파·중도 날개 잃고 ‘일방통행’의 길로

법조계는 ‘신성가족’으로 불린다. 서로 비리를 감싸며 법의 바깥에서 저들 만의 세상을 만들어온 이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낮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얻은 자리라는 국민적 이해가 있었지만, 그 뿌리를 캐보면 실상 무임승차자들이 많다. 이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일제강점기 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 초창기 법조계 모습을 김두식 경북대 로스쿨 교수가 복원했다.

3년여에 걸친 자료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쓴 ‘법률가들’(창비)은 학술서와 역사서의 중간쯤으로 700여쪽에 이른다.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법률가 집단은 김 교수에 따르면, 4개 집단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제1법률가군은 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일제시대 검사를 지낸 이들로, 해방후 한국 법조계 최상층부를 형성하게 된다. 제2법률가군은 조선변호사시험을 통과한 변호사 출신이다. 이 둘은 한마디로 ‘자리’가 보장된 이들이다. 제3법률가군은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판검사·변호사 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미자격자’다. 이들이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려면 실력을 인정받아야 했다. 미자격자는 판사보다 검사들 중에 더 많았다. 이들에게는 뭔가를 보야 줘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잡았으며, 해방공간의 무리한 사건 조작의 배경이 된다. 제4법률가군은 해방 직후 잠시 존속했던 사법요원 양성소 출신이다.

책은 1949년 7월 29일 김영재 차장검사의 체포로 시작된 1차 법조프락치사건으로 시작한다. 그해 5월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와중에 터진 이 사건은 또 한번 나라를 뒤흔든다. 1948년 12월1일 국가보안법이 시행되기 이전, 해방직후 미군정시기 남로당과 법맹에 가입했던 일을 문제삼은 것으로 윤학기·백석황·강중인 등 일군의 변호사들이 줄줄이 엮였다. 다섯 달 후, 제2차 법조프락치 사건에는 해방 이후 법률가 자격을 갖춘 신참 법조인들이 대거 포함됐다. 제3그룹출신인 오제도 검사가 활약한 이 사건으로 1,2,4 법률가군이 일망타진된다.

법조프락치 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역사적으로 사라진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과 국군의 탈환이 이어지면서 관련자들이 월북·납북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법맹을 직접 조직한 조평재와 홍순엽은 이후 문제 없이 남쪽에서 활동, 운명이 엇갈렸다. 조평재의 조카 조순, 남로당 연루 혐의 등으로 구속된 이홍규 검사의 아들 이회창, 이충영 판사의 아들 이수성이 90년대 대권후보로 이름을 올린 건 흥미롭다.

김 교수는 해방공간에 관한 법조계의 기록이 놀라울 정도로 적다며, 좌익과 중도에 속한 사람들 기록이 없어 이 빠진 퍼즐과 같다고 지적한다.

이 시기 법조인들의 인명록을 일일이 작성한 김 교수는 1937년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을 분석한 흥미로운 결과도 제시한다. 제1법률가군으로 불리는 이들 합격생은 유난히 면장집 아들이 많다. 당시 기준으로는 사회경제적으로 최상층부로 재력이 곧 학력인 셈이다.

일제시대 판검사를 지내지 않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즉 제2그룹은 친일논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지만 태평양전쟁 말기 각종 강연에 동원돼 떳떳하진 못하다. 제3법률가그룹은 저절로 복이 굴러온 경우다. 서기나 통역생으로 일본인 판검사를 보조했던 이들이 미군정시기 모자라는 판검사 자리를 꿰찼다. 어떤 자격시험도 거치지 않은 많은 군법무관 출신들도 한국전쟁 이후 변호사로 이름을 올렸다. 해방 당일 시험에 응시했던 기록만으로 법조계에 몸담은 이법회 등 초창기 5년 법조계는 빈자리,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법조역사상 첫번째 사법파동도 이 시기 일어났다. 일명 ‘김계조 사건’으로, 한민당 세력이 장악한 법원과 검찰이 첫 판검사 임용을 정치적 입맛따라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좌익 및 중도 성향의 판사들이 대법원장 퇴진운동을 벌인 것. 이는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을 일거에 불법화시킨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란 역풍을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관여한 변호사들이 나중에 법조프락치 사건으로 몰리게 된다.

김 교수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법조프락치 사건’은 각각 별도의 장을 두어 집중 조명했다.

한국전쟁은 또 한번 법조계를 흔들어 놓았다. 인민군과 국군 사이에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납북인지 월북인지 구분하기 힘든 다양한 행방불명자가 나왔다. 그 결과, “남한의 법조계는 좌익과 중도라는 한쪽 날개를 완전히 상실한 근본적인 한계를 떠안게 되었다”고 김 교수는 지적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한국전쟁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다는 것이다.

현대사의 혼돈의 시기, 특수 직업군의 미시사로 볼 수도 있지만 현재 대한민국 권력의 한 축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 속속들이 보여준다. 진영논리, 전관예우, 관제 빨갱이는 모두 이 혼돈의 시기에 생겨났다. 책은 굵직한 사건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물 하나하나의 행적을 펼쳐나가 ‘법조 활극’이란 수식어에 어울리게 속도감있게 읽을 수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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