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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세민-백롱민 박사로 이어지는 23년간의 ‘신뢰’] “봉사활동이 시혜적으로 비춰질까 세심하게 살펴”
백세민 박사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일반외과와 성형외과에서 전문의를 취득한후 미국 시나이병원의 성형외과 과장을 역임하는 등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전도유망한 전문의였다. 하지만 백세민 교수는 “나를 낳고 키워준 조국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며 홀연 한국행을 택한다.

한국에 돌아온 백 박사는 최근까지도 거의 모든 성형기술의 기본바탕이 되는 ‘광대뼈 성형술’ ‘매몰식 쌍꺼풀수술법’ 등과 안면윤곽수술법을 국내에 보급시키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형외과 전문의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하지만 백 박사가 한국에 들어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늘로부터 받은 자신의 ‘재능’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써야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열 다섯살 터울의 동생인 백롱민 교수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형을 따라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전공의 수련을 위해 과를 결정해야 할 때 쯤 백세민 박사가 한국으로 돌아왔고 백롱민 교수 역시 성형외과를 선택했다. 이후 백 교수는 1989년 형 백세민 박사가 과장으로 있는 백병원 성형외과에 펠로로 들어갔다. 백 교수는 백병원에서 형의 지도하에 하루 20여시간씩 혹독하게 일하면서 형 못지않은 실력을 가진 성형외과 전문의로 성장하게 된다.

두 형제의 지금까지 이어진 봉사정신을 알게해주는 일화가 있다. 모처럼 하루 쉬는 1990년 어느 날, 백롱민 교수는 형으로부터 전라도의 어느 보건소에 순회진료를 다녀오라는 호출을 받는다.

“밤 기차를 타고 동료 몇 명과 함께 도착한 게 아침 9시 반쯤이었어요. 도착하니 얼굴 기형 환자 스무 명이 앉아있더라구요. 서울에서 보던 환자들과 달리 왠지 가슴이 찡하고 그들을 위해 뭔가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서울에 올라와 본격적인 진료를 받으라고 했더니 ‘애가 집 밖에도 못 나가는데, 어디 이 얼굴을 하고 서울로 가느냐’고 고개를 내저었어요”

서울 돌아온후 백 박사 형제는 의기투합해 전국을 20개 구역으로 나누고 사회에 나오기조차 꺼려하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 진료 하는 순회진료를 시작하게된다. 수술비도 없는 이들에게 백 박사 형제는 사비를 털어 한 해 100명씩 수술을 해줬다. 전국 오지를 돌며 시작된 이 의료봉사는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 봉사를 모태로 SK그룹의 후원으로 ‘세민얼굴기형돕기회’라는 의료법인을 태동시키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베트남 등 얼굴기형 어린이 무료수술사업으로 확장하게된다.

매년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하기 전, 백롱민 교수는 매년 새로 봉사에 합류하는 의료진에게 간략하게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그들의 역사가 얼마나 존중받을 만한 것인지, 왜 그들을 동정의 눈으로 봐서는 안 되는 지에 대해 역설한다. 그리고 ‘웃음을 돌려준다’는 큰 목표와 그것이 이뤄졌을 때 돌려받을 수 있는 밝은 미소의 가치를 강조한다. ‘Smile for Children’이라는 세민얼굴기형돕기회의 슬로건은 그래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만드는 문구이다.

백롱민 교수는 “봉사활동이 현지 사람들에게 시혜적으로만 비춰지지는 않는지, 혹시 봉사단의 누구라도 봉사 대상자들의 마음이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지를 봉사기간 내내 세심하게 살필려고 노력합니다.”

언젠가는 한국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현지 의료진의 교육까지 도맡아 하는 백 교수의 모습은 ‘좋은 의사가 왜 위대한 직업인지를 알게해주는’ 표본이었다.

김태열 기자/kt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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