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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연의 외교탐구] 27일 간의 리비아 피랍 엠바고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진=리비아 매체 캡쳐]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1. 2004년 고(故) 김선일 씨 피살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김선일 씨의 소속회사가 정부에 알리지 않은채 무장테러단체와 교섭을 벌인 와중에 정부는 이라크 한국군 파병방침을 발표했다. 중동 알 자지라 방송은 파병철회와 구출을 처절하게 호소하는 김선일 씨의 영상을 여과없이 보도했다. 우리 언론도 이 모습을 그대로 보도했다. 여론은 파병문제를 놓고 분열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정부는 간접협상과 언론대응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2. “승자는 탈레반이요, 패자는 한국 정부와 언론”

2007년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일명 샘물교회 피랍사건)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김선일 씨 피살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정보공개를 자제했다. 하지만 한 가지 변수를 깜빡했다. 바로 ‘외신.’ 정부가 현지 취재를 불허하면서 언론은 외신에 의존해 사태를 보도했다. 하지만 외신들의 무분별한 보도와 우리 언론의 ‘외신 받아쓰기’는 사태를 악화시켰다. 비보와 오보, 낭보가 난무했다. 무려 23명이 납치된 유례없는 사태 속에서 우리 국민 2명이 살해됐다. 남은 21명의 석방을 위한 협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탈레반의 ‘대면협상’을 수락했다. ‘정부는 테러단체와 직접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깨진 순간이었다. 21명의 국민들은 무사히 석방됐다. 하지만 정부와 언론 모두 상처를 입었다.

#3. 2007년 5월 마부노 1, 2호 납치사건은 사건발생 즉시 언론에 공개됐다. 정부는 당시 ‘해적들에게 정부가 나서서 돈을 줄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여론의 비난에 선사는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몸값으로 건넸다. 이후 잇단 피랍사태가 발생했다. 2010년 11월 삼호드림호 피랍사건에서 삼호해운 측은 몸값으로 950만 달러(약 106억 원)의 거액을 건네는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했다.

#4. 각종 피랍사태들을 계기로 언론인들은 국외지역 취재망을 확대하고, 위험지역의 보도준칙 등을 마련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피랍문제 대응매뉴얼이 구축됐다. 2011년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삼호주얼리호를 구출하기 위해 정부는 아덴만의 여명작전에 대한 엠바고 준수를 국방부 출입기자들에게 요구했다. 기자들은 선원과 장병의 위험을 감안해 군 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유례없는 군ㆍ언론 간 협조체제로 구출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1차 구출작전에서 특수전 요원 3명의 총격부상을 보도한 일부 매체들에 대해 정부가 전방위적 중징계조치를 하면서 ‘언론을 대상으로 한 과잉징계’ 논란이 불거졌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보복을 시사하면서 작전이 선원들의 생명과 안전을 도외시한 무모한 작전이었다는 비판도 나왔다.

#5. 2011년 4월에는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제미니호가 피랍됐다. 정부는 1년 반 이상 이 사실을 엠바고로 묶어뒀다. 일부 매체의 보도로 외교부 기자단은 엠바고를 깨기로 결정했고, 뒤늦게 보도가 쏟아졌다. 협상과정에서 해적들은 정부가 움직이면 몸값을 더 받을 수 있다고 보고 국내 언론과 접촉하거나 유튜브에 선원 동영상을 공개하는 등 언론플레이를 펼쳤다. 가족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살해협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소말리아의 새 정부가 공권력을 강화하면서 해적들의 입지가 불리해졌다. 결국 1년 7개월 만에 선원들은 전원 석방됐다. 


지난 15년 사이 발생한 각종 피랍사건에 대응하면서 정부와 언론은 피랍인을 보호하고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보공개 방안을 고민했다. 특히 위 5가지의 피랍사건를 통해 정부와 언론은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먼저, ▷ 지역 무장단체나 해적에 의한 대부분의 납치행위는 오로지 경제적 이득을 위해 감행됐으나 ▷ 테러단체의 납치행위는 정치협상 혹은 군사요구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또 ▷협상이 현재진행형인 상태에서는 일정 수준의 ‘엠바고’(보도유예)가 필요하며 ▷외신보도가 나오더라도 피랍사태의 당사자에 속하는 내신 입장에서는 보도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편이 좋다는 것을 배웠다.

▷ 군사작전만이 능사는 아니며, ▷ 엠바고가 장기화 되더라도 정부와 언론은 정보를 공유해 불필요한 오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지난달 6일 10여 명의 무장괴한이 리비아 서부 자발 하사우나 지역 대수로 공사장 숙소를 급습해 필리핀인 3명과 한국인 1명을 납치했다. 외신이 현지 관리자를 인용해 사건을 최초 보도했다. 필리핀 정부는 자국민 3명의 납치사실을 공개했다. 반면 우리 정부는 피랍인의 신변을 우려해 외교부 기자단에 보도자제를 요청했다. 과거 사례를 고려해 내신도 외신보도에도 불구하고 보도를 자제했다.

하지만 1일 현지 유력언론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피랍자들의 동영상을 게재하자 엠바고는 해제됐다. 언론에서 아무리 정보를 제한해도 SNS상 영상 유포는 차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언론은 SNS세상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음을 체감했다.

정부의 일관성 없는 엠바고 해제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불과 넉달 전 정부는 가나에서 피랍된 마린 711호의 소재를 파악하지 않은 채 외신보도를 이유로 엠바고를 해제한 바 있다. 당시 정부가 ‘피랍사건 대응 매뉴얼’을 깨고 엠바고 해제했기 때문에 비판이 제기됐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이번 대응은 혼란을 가중시킨 측면이 있다.

하지만 비판의 목적은 ‘보다 나은 대안을 마련’한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피랍인을 구출하는 것이지, 엠바고 적용기준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엠바고 적용기준은 피랍인을 구출한 다음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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