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임정수립 100년 잊혀진 사람들④ - 항일운동가 염온동 선생] “윤봉길 의거 이후 中서 정부지원 많았지만, 우리는…”

염온동 선생 아들 염낙원 지부장
광복후 돌아온 조국서 고아원생활
“항일운동정신 다시 살려야” 강조


“맛있냐?”

경기도 수원의 한 식당에서 만난 염낙원(82) 광복회 경기지부 지부장이 옆 테이블에 있는 중국인 학생 무리에게 말을 건넸다. 중국인 학생들은 긴 중국어로 여기에 답변했다. 염 지부장도 이어 중국어로 응수한다. 양측은 오랜시간 중국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창한 발음이었다.

대화를 마치고서 염 지부장은 “초등학교 어린시절에 배운 언어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염 지부장은 부친인 항일운동가 추정 염온동(1898~1946년) 선생을 따라 오랜시간을 중국에서 머물렀다. 1936년 중국 뤄양에서 태어난 그는 난징과 충칭 등지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교육을 받았다.

부친 염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과 오랜시간 함께 활동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보성전문학교에 재학중이던 1919년 3ㆍ1운동에 가담한 것을 시작으로 항일운동가의 길을 살았다. 1921년에는 상하이로 망명했고, 임시정부 의정원, 한국혁명당 등에서 활약했다. 당시 한국인 중 몇 되지 않던 비행사로 인도의 캘커타, 중국 각지에서 군사활동도 벌였다.

활발히 활동하던 염 선생은 중국 땅에서 광복 소식을 맞았지만 끝내 국내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광복 직후 남한에 들어온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길 바랬다. 김구 선생 등 임정 최고 지도부는 ‘정부자격으로 귀국해야 한다’며 광복 후에도 다른 임정 요인들이 충칭에서 잠시 더 머물 것을 종용했다. 김구 선생은 동지인 염 선생에게 “우리가 먼저 들어가 임정이 정부자격으로 국내에 돌아올 수 있도록 힘을 쓰겠다”고 약속하며 한반도로 향했다.

하지만 염 선생은 김구 선생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염 선생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갑작스레 병을 얻은 뒤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작고했다.

염 지부장은 “병을 얻어 한동안 끙끙 앓으시던 부친이 주무시던 중 사망하셨다”면서 “부친이 돌아가시던 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부친의 작고 후 염 지부장의 가족은 개인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왔다.

부친의 항일운동과 함께 했던 1930년대 이후 중국 활동은 그에게는 이전보다는 비교적 윤택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사를 본 장제스 중국 총통이 임시정부에 많은 지원을 했다. 일본군의 공세가 심해질 때면 차를 빌려서 항일운동가들의 대피룰 도왔고, 식량을 지원했고,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는 대절해줬다.

하지만 광복된 조국에서의 실상은 정 반대였다. 염 지부장은 손윗누이와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다. 염 지부장의 모친은 생계를 위해 부잣집에 들어가 식모살이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부친과 함께 활동했던 항일운동가들도 도와줄 형편이 못됐다.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선생 등 항일운동 최고지도자들이 우익단체에 차례로 암살됐고, 대부분 항일운동가는 조용히 숨어서 살아야 했다.

이에 염 지부장은 “가족을 잃은 많은 항일운동가의 자제들이 (나처럼) 광복 후 고아원에서 생활했다”면서 “이들에게 사람들은 (중국에서 왔다며) ‘똥개놈’이라고 부르고 손가락질 했다”고 했다. 염 지부장에게 이런 대한민국은 애정과 한스러움의 감정이 함께 섞여있는 나라다. 부친 염 선생이 그리워했던 나라지만, 한편으로는 설움의 나라다. 염 지부장은 “대한민국은 지금까지는 나라를 위해 목숨바쳤던 항일운동가들의 삶을 초라하게 만들었다”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항일운동가들의 민족정신을 다시금 고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원=김성우 기자/zzz@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