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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안희정의 맥주, 담배 그리고 고학력 여성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좌우명은 역지사지라고 한다. 그는 지난 대선 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소통을 강조하며 “세상에는 일방적으로 옳은 사람도 틀린 사람도 없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상호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포용력있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러나 지난 2일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 조병구) 심리로 열린 성폭행 혐의 재판에서 보여진 안 전 지사의 평소 모습은 이와 사뭇 달랐다.

검찰에 따르면 고소인 김지은 씨가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로 근무할 때 24시간 휴대폰을 소지해야 했고 목욕을 할 때도 비닐봉지에 휴대폰을 가져가야만 했다. 수행비서의 가방엔 도지사의 담배와 라이터, 명함, 필기구 등은 항상 몸에 지니고 로션, 물티슈, 빗도 모두 가방에 넣고 다녀야 했다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모두 ‘업무매뉴얼’에 나와있었다. 도민을 위해 봉사하는 도지사를 보좌하는 수행비서가 안 전지사를 연예인 매니저처럼 쫓아다녀야만 했던 셈이다.

안 전 지사는 적어도 가장 가까이 있는 부하직원과 소통하지 않았다. 그는 지시를 ‘맥주’, ‘담배’, ‘가방’ 등 한 단어로 내렸다. 수행비서는 기계처럼 지시에 따라야만 했다. 수행비서는 도지사의 기분을 거슬러선 안 되는 중요한 미션도 갖고 있었다. 검찰에 따르면 김 씨는 수행비서로서 업무 인계를 받으면서 “모두가 노(No)라고 할 때 수행비서는 예스(Yes)라고 말해야 한다”는 등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 받았다.

검찰이 제시한 참고인 진술조서에는 안 전 지사가 돌연 일정을 취소해 캠프 관계자들이 긴장하는 등 평소 업무 분위기가 수직적이고 권위적이었다는 내용도 담겨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소통과 협치를 강조해온 그가 부하직원을 ‘종’을 대하듯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충청남도를 이끌어야 하는 무거운 자리가 만들어낸 악령인가.

이날 안 전 지사측은 피고인 김 씨와의 성관계는 있었지만 강제력은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동’과 ‘장애인’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안 전 지사 측은 “피해자는 아동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다. 안정적인 공무원 자리를 버리고 무보수로 캠프에 올 만큼 결단력 있는 스마트한 여성이다. 주체적인 여성에게 위력이 어떻게 행사됐는지, 어떻게 수 차례 성폭력이 지속될 수 있었는지 불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고학력 여성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주체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 스마트한 여성은 성폭행을 당할 가능성이 적다는 이러한 발언은 매우 위험하다. 수많은 성폭행 사건이 알려주듯, 성폭행은 학력과 상관없이 여성의 ‘스마트함’과 상관없이 발생한다. 여성이 고학력이고 결단력이 필요한 커리어를 가졌다고 해서 업무적 상하관계가 얽힌 성폭행 상황에서 거부의사를 표했을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게다가 굳이 스마트한 여성과 아동과 장애인 등을 비교할 필요는 없었다. 안 전 지사가 평소 강조한대로 ‘역지사지’ 입장에서 아동과 장애인의 입장에서 이 말을 곱씹어 보면, 피해자가 아동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기 때문에 수 차례 성폭력이 있었을 리 없다는 그의 주장에는 ‘아동과 장애인은 개인 의사를 표하지 못할 만큼 스마트하지 못하고, 이들에게는 성폭행 가해자가 위력을 행사하기 쉽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여기엔 아동과 장애인을 비주체적이고 성적자기결정권이 부족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문제는 이러한 발언을 아동과 장애인의 인권 보호 측면이 아니라, 김지은 씨의 스마트함을 강조하기 위해 쓰였다는 점이다.

안 전 지사의 성폭행 혐의는 조만간 법정에서 밝혀질 것이다. 안 전지사가 대선 후보였던 것만큼 이번 사건과 별개로, 대중은 그의 평소 행실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정치인으로 약속했던 ‘역지사지’와 ‘소통’의 리더십에는 소질이 없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sa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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