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은 ‘버닝’은 설명하지 말고 느끼기를 바라고 만든 영화라고 했다. 영화에는 상징적인 장면이 너무 많아 모호하다. 진행도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소설적 구성이다.
“관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서사대로 보고, 그렇게 안되면 비판한다. 하지만 그 어떤 서사도 완벽하지 않다. 모호함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게 다가 아니다’는 미스터리를 다루는 영화다. 대중이 받아먹기 쉬운 영화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새롭고 낯선 걸 해야 한다.“
이창동 감독의 이 말은 관객의 “이게 뭐지”라는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젊은이는 관념적이고 미스터리 그 자체다.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와 어릴 적 종수의 동네 친구인 나레이터 모델 해미(전종서), 고급차를 타고다니는 남자 벤(스티븐 연)은 계급적 상황은 분명하지만, 하는 짓이나 말은 분명하지 않고 어딘가의 경계에 서있는듯한 느낌이다. 해미가 춤을 추는 장면인 그 노을은 밤과 낮의 경계이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이기도 하다.
‘버닝’은 대사에도 나오지만 ‘메타포’(은유)가 많아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이 영화를 보면 종수가 벤에게 느끼는 무력감은 이해되지만, 종수의 분노가 감정적으로 잘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이 그런 모호함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사실 화가 나는데 어디에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령 공직자가 뇌물 혐의로 구속되면 국민들은 분노한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대법원에 가면 상당수가 무죄가 된다. 그리고 원래의 자리로 컴백한다. 국민들은 어디에다 화를 내야 할까?
이창동 감독은 “우리 세대는 뭔가 세상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없어졌다. 그럼에도 세상은 깔끔, 편리, 세련돼지고, 개인은 점점 왜소해진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없어지고 있다”면서 “분노하라고 말하는 책도 있었지만, 변한 건 별로 없다. 대상이 없다는 게 더 큰 분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판토마임, 고양이, 우물, 비닐하우스 등으로 있는듯, 없는듯한 존재의 메타포를 던진다. ‘없는데 있는 것처럼 상상 또는 착각하는 젊은이의 세상’으로, ‘있는데 그것을 희미하게 만들거나 없애버리는 부조리한 세상’을 비판한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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