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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기의 만남, 역사 바꾼 정상외교]동서독 정상, 공식 7회·비공식 6회 회담만에 통일로 ‘행진’
서독 브란트-슈미트-콜 바통
동독 슈토프-호네커-모드로우
‘동서독 기본조약’ 평화공존 발판
베를린 장벽 붕괴, 완전한 통일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 작은 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낫다(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이 지난달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열었다. 통일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독일 통일을 이끈 브란트 총리의 말처럼 우리도 작은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 국가였던 독일은 첫 정상회담이 열리고 20년 만에 통일을 이뤄냈다. 종전선언, 평화협정 등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관계의 끝은 결국 평화통일이다. 앞으로 길고 긴 여정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서독과 동독의 통일과정에 관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1970년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제공=위키미디어 공용]

통일 전 서독과 동독은 모두 7차례의 공식 정상회담과 6차례의 비공식 정상 접촉을 했다. 이 가운데 4차례의 공식회담은 베를린장벽 붕괴 이전에 치뤄졌다.

공식회담을 되짚어 보면 1차와 2차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1970년 3월과 5월 동독 에어푸르트에 이어 서독 카셀에서 만나면서 이뤄졌다.

두 차례의 회담은 관계 정상화가 목표였기 때문에 실질적 성과가 없는 상징적인 만남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실무 접촉을 이어가면서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 평화공존의 발판을 마련했다.

냉전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3차 회담은 11년 후인 1981년 헬무트 슈미트 서독 통리와 에리히 호네커 동독 총리 때 열렸다.

이어 호네커 총리의 요청으로 1987년 9월 4차 정상회담이 열렸고, 그는 동독의 최고지도자로서 사상 처음으로 당시 서독의 수도인 본을 방문했다. 슈미트를 이은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는 전임 총리들보다 적극적으로 분단 문제 해결에 나서면서 4차 회담 후 동서독간 경제협력이 가속화됐다. 당시 사회주의 계획경제 실패로 재정파탄에 빠진 동독의 상황도 한몫했다.

5차 회담은 호네커 정권이 실권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1989년 11월 9일)된 직후 열렸다. 최초로 통일을 의제로 다뤄졌다는 점에서 큰 걸음을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동독 공산정권의 위기 상황에 집권한 한스 모두로우 총리가 서독의 콜 총리에게 통일카드를 제시하며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다. 이에 콜 총리는 자유선거를 역제안 하면서 1990년 동독에서 처음으로 자유총선이 실시됐다. 1990년 2월과 4월에 6차와 7차 회담이 차례로 열렸고 같은해 10월 마침내 서독과 동독은 통일 국가가 됐다.

통일 독일이 되기까지 수 차례의 공식ㆍ비공식 정상회담도 중요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합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재 우리도 종전 선언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의 조율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당시 소련은 쇠퇴기였고, 현재 중국은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걸어야할 여정이 더 길수도 있다.

한희라 기자/hanir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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