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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도 당했다” 서점가 성폭행 관련도서 봇물
자전에세이부터 소설, 넌픽션까지… 성폭력 고백
말과 글로 드러내기가 치유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길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강간은 생각보다 훨씬 자주 발생하는 범죄다. 그리고 주된 피해자는 대학생 연령대 여성들이다.”
논픽션 작가 존 크라카우어는 2010~2012년 몬테나 대학에서 일어난 성폭행사건을 다룬 르포르타주 ’미줄라‘를 통해 성폭행, 강간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크라카우어는 미 법무부가 2014년 12월 발표한 특별보고서를 인용, 1993~2013년 기간, 모든 연령층 가운데 18~24 세 여성의 강간 및 성폭행 피해율이 가장 높았다는 점을 제시한다. 이 고위험군의 연간 성폭행 피해자는 무려 11만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이 범죄를 신고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집계조차 어렵다. 이들은 왜 신고를 하지 않는 걸까?

연초부터 불이 붙은 미투 운동으로 국내 서점가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자전 에세이부터 자전적 소설, 넌픽션까지 이들의 목소리는 지금 미투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몬태나 대학에서 일어난 강간 중 세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르포타주 ‘미줄라’(원더박스)는 성폭행 사건이 왜 흐지부지되고 피해자의 2차피해로 이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몬태나 대학은 이 도시의 자랑거리로 그 중심에 미식축구팀 그리즐리가 있다. 인구 7만의 도시, 학생이 1만5000명인 도시에서 마을 사람들은 가족처럼 친밀하다.

대학생 앨리슨 휴거트는 2010년9월 개강을 앞두고 어머니 집에서 지내던 중, 친구 윌리엄스와 함께 도널드슨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다른 대학에 입학해 얼굴을 본 지 오래된 도널드슨과 앨리슨, 친구들은 반가움과 편안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자 도널드슨의 집에서 자고 가기로 한다. 평소 소파에서 자길 좋아했던 앨리슨은 잠결에 이상한 움직임과 무게에 눌려 눈을 뜨지만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질지 몰라 눈을 감고 강간을 당한다.

도널드슨이 거실을 빠져나간 뒤, 단추가 떨어져 나간 청바지를 움켜쥐고 도망쳐 나온 앨리슨은 자갈밭을 달려 도망치고 이를 본 도널드슨이 바짝 뒤쫒는다. 극한 공포 속에서 탈출에 성공하지만 앨리슨의 삶은 파괴된다. 어린시절 남매나 다름없이 지내온 오랜 친구가 괴물로 변해 앨리슨을 집어삼킨 것이다. 어머니와 친구 몇 외에 아버지와 친자매에게도 감췄던 강간 사건은 15개월 만에 도덜드슨이 자백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그러나 고통은 이게 다가 아니다.
정신이 아뜩하고 혼미한 피해자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건 경찰의 피해조사와 법의학적 검사다. 수 시간 동안 상황을 몇번이고 상기해 진술하고 몸을 드러내야 하는 수치감에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워한다.
이 보다 더 이들을 분노케 하는 건 무고 의심이다. 여성 피해자들은 사건을 맡은 경찰로부터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여성들이 바람을 피우고는 강간당했다고 거짓 신고를 하거나 피해자가 거짓말로 세상의 관심을 받으려 한다는 의심을 먼저 하는 것이다.

이는 강간사건을 맡은 변호사들의 단골 전략이기도 하다. 앨리슨 휴거트 역시 분명한 가해자 자백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과 그리즐리 팬, 지인들로부터 의심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 사건이 검찰로 이관돼도 산 넘어 산이다. 입증이 어려운 만큼 검찰의 기소는 약 12%에 그친다. 그것도 배심원 재판에서 뒤집어질 수 있다.

저자는 그럼에도 피해자들이 드러내 말해야 하는 이유로, 강간범은 피해자의 침묵을 통해 책임에서 벗어나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페미니즘 열풍을 몰고 온 ’나쁜 페미니스트‘의 작가 록산 게이의 자전 에세이 ’헝거: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사이행성)는 열두 살 소녀가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어떻게 파괴해 나갔는지 보여준다. ‘초원의 집’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꿈꿨던 소녀의 꿈은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무너져 내린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그가 선택했던 건 매력적이지 않은 몸매를 만드는 일, 추가의 피해를 차단하는 수단으로 스스로 살을 찌우는 일이었다. 그렇게 몸은 축적돼가며 261kg으로 불어났다.
강간을 당한 뒤, 피해자인 그는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비난의 시선을 받게 된다. 소년들이 지어낸 각기 다른 이야기에서 진실은 왜곡됐고, 여자아이의 말은 그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걸 알자 그는 침묵했고, 독이 돼 몸에 퍼지게 된다.

몸집이 커지면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 먹고 또 먹는 이상행동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렇게 안전해진 몸은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뚱뚱한 몸‘에 대한 세상의 혐오의 시선은 그를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게 한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욕된 몸을 들여다보고 오랜 상처를 들춰내기로 한 건.“성폭력에 따른 고통이 한 사람의 일생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파장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은 사람이 똑똑히 알 수 있게게 되기를 바라서”라고 작가는 말한다.


장편소설 ‘다크 챕터’(한길사)는 타이완계 미국인 위니 리의 자전 소설로 하버드 대 출신의 영화제작자로 잘나가던 그가 성폭력을 당한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담아냈다. 미국 상류층 여성인 주인공 비비안은 런던에서 성공한 영화제작자로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2008년 4월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 힐즈에서 하이킹을 하던 중 열 다섯 살 소년 조니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조니는 사회 하층민 유랑민으로 아버지, 형과 함께 캐러밴에서 생활한다. 아버지의 폭력과 구타에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떠나고 그는 마약을 하고 포르노 잡지를 보며 아버지와 형을 닮아간다. 조니는 한껏 봄햇살을 즐기며 하이킹을 하던 비비안을 덮치고 폭력을 행사해 무력하게 만든다.

그 사건 이후 불면증에 시달리며 자살까지 생각한 비비안을 도운 건 친구들이다. 그는 성폭행을 당한 뒤 혼미한 상태에서 온 정신을 끌어당겨 친구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말을 토해낸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을 확인하고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주기 위해 이 사건을 언어로 만드는게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의 솔직한 고백은 친구들로부터 위로받고 공감대를 얻으면서 충격에서서 벗어나 사회전반의 성폭력사건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작가는 피해자의 심리와 사건을 세밀하게 그려낼 뿐 만아니라 가해자의 심리를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낸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건을 보려는 균형적 시각이 놀랍다.
위니 리는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 제가 겪은 너무나 끔찍한 성폭행과 그 이후의 제 삶을 온 세상이 볼 수 있도록 낱낱이 드러내는 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낯선 일”이었다며. 이런 사건이 무수하게 일어나도 방조해버리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서, 성폭행은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어나때문에 수치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수치심은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또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건 누구도 내가 겪은 일을 모른다는 어마어마한 외로움이었다“며, “우리가 함께 성폭력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고 위로했다.
위니 리는 책 출간을 기념해 3월 하순 방한해 한국독자와 만난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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