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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투 전방위 확산]2차 피해 두려워…익명성 뒤에 숨을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관심…‘꽃뱀’ 취급도
-형법 “사실적시도 ‘명예훼손죄” 범죄은닉 일조
-美 獨 등 ‘정치적 악용우려’ 명예훼손 불인정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 한국 사회에 미투 운동이 전방위로 확산되는 가운데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신원을 숨긴 채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익명으로 폭로를 이어가고 있다. 현행 법률과 그릇된 인식이 피해자들의 공개적인 폭로를 제한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투 운동이 처음 촉발된 곳은 미국 헐리우드다. 지난해 11월 미국 정상급 여배우들이 거물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틴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미투 운동이 전개됐다. 


그러나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시작된 것은 서지현 검사가 얼마 전 검찰 내부 게시판에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뒤부터다. 이후 법조계는 물론 문화예술계와 대학가까지 미투 운동이 확산됐지만 일부를 제외하곤 익명으로 성추행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연극인 이윤택의 성폭력 사건의 기폭제가 된 글도 ‘보리’라는 가명의 피해자가 쓴 폭로 글이었다. 배우 조민기 성추행 사건 역시 학생들의 익명 폭로가 줄을 이었다.

일반 직장인들도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를 통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쏟아냈지만 이들 대부분 자신의 신원은 물론 가해자까지 특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피해자들이 익명으로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평소 성범죄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초점을 두는 우리나라 관행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범죄가 발생하면 피해자들은 대부분 신상이 털리고 꽃뱀 논란 등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일부 피해자들은 직장 생활까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성범죄 피해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폭로 이후 불이익 조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미투 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서지현 검사도 성추행 피해 폭로 직후 “사건의 본질과는 관련이 없는 자신의 업무 능력과 성격에 대한 악의적 소문이 돌면서 2차 피해를 당하고 있다”며 괴로움을 호소한 바 있다.

지난 11월 미국의 미투 운동이 곧장 전세계로 번졌지만 우리나라는 정작 최근에서야 미투 운동이 시작됐다. 이 또한 피해자들이 공개적으로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을 꺼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사실을 폭로해도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명예훼손죄가 피해자들을 위축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형법 307조에 따르면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거짓말뿐만 아니라 사실을 공개해도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가해자들은 이 조항을 악용해 피해자들을 고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지현 검사 역시 공개적으로 방송 인터뷰에 임했을 당시 “명예훼손 피소를 각오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이나 독일 등 선진국에선 ‘사실 적시의 명예훼손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15년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도 우리나라에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성폭력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과 사회 제도가 피해자 보호에 초점에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문제의 원인은 가해자와 그의 범죄를 은닉하는 데 일조해온 사회 제도”라며 “피해자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뒤집어쓰는 불합리한 현실을 개선하고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핵심 가치”라고 밝혔다.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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