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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유산 익산 왕궁리 유적, 베일을 벗다
백제유적 궁궐 담장과 후원영역 전면 개방
“외면당한 백제 역사 제대로 되짚자” 목소리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서동’으로 알려진 백제 무왕은 실제로 부여에서 익산으로 도읍을 옮겼을까.

부여는 행정 중심, 익산은 군사외교통상 중심도시였을까.

한성과 화성 관계 처럼, 각각 국정 중심, 행궁 역할을 했을까.

사라진 익산 왕궁리 유적은 많은 궁금증을 낳게 한다. 지금까지는 전문가들간의 고증과 토론만 이뤄졌다면, 이제 이 궁금증을 푸는 토론은 5000만 국민으로 확대된다.


베일에 싸인 익산 왕궁리 유적이 오는 11일 전면 개방된다.

멀리는 1000여년전, 가까이는 약 100여년전부터 서울(서라벌의 변천어)과 신라 중심의 역사 고증 및 기술(記述)이라는 빗나간 주류사학계 관행 때문에 찬란한 백제의 문화는 제대로 발굴도 고증도 해석도 되지 않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이외의 동아시아 역사서들은 고조선, 부여의 맥을 이른 고구려와 백제가 한민족 역사의 근간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유독 우리 교과서는 경주(서라벌) 가문 출신이자 중국 정권(송)과 긴밀하게 친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대거 채택하고 있다.

베일에 가려졌던 익산 왕궁리 유적, 아직도 알수 없는 전주의 2000년 역사, 서백제의 존재와 한민족을 빼닮은 홍산문명 등은 사학계가 앞으로 두고두고 조사 연구한 뒤, 역사 교과서에 적극 반영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0)때 조성된 궁궐터로 문화재청과 익산시가 발굴 및 정비를 완료함에 따라 궁궐의 담장과 후원영역에 한해 개방하게 됐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궁궐 담장은 안쪽과 바깥쪽을 잘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쌓아 올렸으며, 길이는 동서로 230m, 남북으로 495m(총 1454m)에 달한다. 행궁보다는 분명히 크고, 도읍지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확인된 잔존 높이(최고 1.2m)까지만 담장을 정비했다. 관람객은 담장과 함께 7개의 문지(門址)와 수구(水口), 암거배수로(暗渠排水: 지하에 고랑을 파서 물을 빼는 방법)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후원은 왕궁리 유적 내 북동편에 커다란 구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구릉의 경사면 아래쪽에는 담장과 인접하여 폭 2.7∼7.2m, 길이 485m의 대형 수로가 동, 북,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릉 주변의 길고 짧은 6개의 곡수로(曲水路)와 4개의 집수시설(集水施設)은 효율적인 물의 저장과 배수, 조경 등에 사용됐다.

발굴조사에 따른 익산 왕궁리 유적 궁궐 담장과 후원영역에 대한 정비사업은 2011년부터 지속해서 추진됐으며, 올해 하반기부터 후원의 조경과 정원유적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후원의 네모난 연못과 구불구불한 물길을 화려한 정원석으로 꾸민 조경(造景) 기법 등은 고대 중국인 당나라와 일본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의 궁궐 정원에서도 엿볼 수 있는 양식으로 이는 당시 백제인들이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문화적으로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상고사 이후 역사의 왜곡은 부당한 영토 조약을 낳고, 고구려-백제사를 외면한채 신라 중심의 기술에 치우친 정치적 역사 기술은 국내 역사서와 해외 역사서 간 괴리를 넓혔다. 상고시대 이후 백제의 대외 개척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대륙(중국)의 동부 연안, 섬(일본)의 남부지역와 백제간 교류는 통상의 성격인지, 옛 식민지와의 우호교류인지, 연방제 형태의 혈맹인지 여부도 원점에서 잘 고증해봐야 한다는 충고도 들린다. 침소봉대는 위험하며, 삼국사기에만 의존한 지금의 주류 역사 기술 역시 ‘논리 비약 내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의한 한민족 축소 지향’ 경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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